책갈피

by 강노아

도서관책을 빌려와 읽다가, 우연히 책갈피를 발견했다.


시장에서 사과 한 개 덤으로 얹어주던 아주머니가 떠올랐다.

공짜로 무언가 얻을 때 느끼는 희열이 책갈피에서 스며 나왔다.


종이 책갈피에는 누군가의 낙서가 남아 있었다.

원래 주인의 것일까? 아니면 돌고 돌다 쓰였을까.


낙서에는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반듯하고 잘생긴 필체는 왠지 여성의 것 같았다.


이 번호로 전화하면 누가 나올까?

온갖 생각이 꼬리를 물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의 학창 시절엔 고속버스에 안내양이 있었다.


그때는 시내버스에도 작은 빵떡모자와 요즘 여행자들의 전대 같은 주머니를 찬 차장이 있었다.

그녀가 승객을 욱여넣으며 "오라이"를 외치면 운전기사는 만원 승객을 안쪽으로 밀어 넣는 요술을 부렸다.


"어이쿠, 밀지 마요, 아파요"


남녀 병설교에 다니던 나는 운이 좋으면 우리 학교 여고생과 살을 맞대고,

운이 없으면 뚱뚱한 직장여성의 짙은 향수냄새를 견뎌야 했다.


암튼 그때는 그것을 불행이라 느끼지 않았다.




한 달에 한번 어머니는 서울에서 대전으로 친정 부모님을 만나러 다녔다.

집안의 장손이었던 나는 늘 영웅대접을 받았고,

그래서 늘 따라다녔다.


아들만 사랑하던 조상들이 성차별의 원점이지만 나는 아들이라 그저 좋기만 했다.


외할머니는 빠듯한 살림 속에서도 고기반찬을 올려놓았다.

밥시간에 차려진 두 개의 밥상에는 여자들-숙모네 여자 아이들,

그리고 나는 할아버지와 따로 겸상을 했다.


그 밥상엔 사촌들이 감히 맛보지 못할 갈치조림과 갈비찜이 있었다.


" 많이 먹어라, 내 새끼 "


외 할머니는 배가 부른데도 하얀 이밥을 가득 담아 내 밥그릇은 마치 뻥튀기처럼 수북했다.



중학생이 되자 나는 혼자서도 대전을 왕래했다.


그 시절 고속버스에는 요즘 비행기 승무원 같이 예쁜 누나들이 동승했고 가는 동안에 음료도 나누어 주었다.

그날 만난 그녀는 롯데가문으로 뛰어간 연예인 서미경을 닮았다.

버스에 올라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내 가슴은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너무 예뻤고 당장 급하게 나이를 먹어 그녀에게 청혼하고 싶었다.


그녀가 표검사를 했다.

고운 손가락은 길었다.

목소리도 푸근했다.

웃는 미소는 완벽했다.


나는 건너편 밥상에서 따로 밥 먹는 여자에게 빠져버렸다.


그날, 그녀는 승객들에게 플라스틱으로 만든 책갈피를 나누어 주었다.

물론 박카스 광고가 인쇄된 책갈피였다.


자랑스러운 경부고속도로 위에서, 난 한숨도 자지 못했다.

종일 운전석 옆의 그녀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어린 노무자슥이 스토킹 king? 이 되려고 환장한 모양이다.


" 안녕히 가세요"


도착하자 그녀는 승객에게 일일이 인사를 했다.

나는 한마디도 못했지만 그녀를 내 마음에 모시어 들였다.


"안내양은 사랑입니다."


그녀를 지우기까지는 몇 년이 걸렸다.


어느 날 학교 도서관에서 빌린 책 안에 그녀의 책갈피를 두고 내렸다.

짝사랑은 책갈피와 함께 나를 떠났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그런 스타일의 여자에게 호감을 느낀다.




도서관 책을 반납하며 책갈피를 그대로 꽃아 보냈다.


누군가 그 갈피를 보면 잠시 멈추어


혹시 나처럼 추억에 젖을까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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