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어떤 움직임이 마리의 눈에 띈다. 녹아내린 플라스틱 끄트머리처럼 울적한 지평선에서 까만 점 하나가 나타나더니 서서히 이쪽을 향해 다가온다. 비행정인가? 하지만 그것이 땅바닥에 납작 달라붙어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마리는 낙담한다. 도로주행 모듈의 엔진 소리. 오버로드다.
거대한 바퀴 위에 상자 모양의 차체가 떡하니 얹힌, 21세기에나 유행했을 법한 용맹스러운 모습의 오버로드가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마리의 앞에 멈춰 선다. 사면의 검은 창문들이 투명해지면서 탑승자의 모습이 나타난다. 활기차 보이는 동양인 여자 한 명이 싱글싱글 웃으며 마리를 바라보고 있다.
마리?
네. 누구시죠?
린이에요. 늦어서 미안해요.
여자의 입에서 낯선 언어가 쏟아져 나오자 마리의 귓속에 잠들어 있던 이어피스가 윙 하고 깨어난다. 마리는 여자의 말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들려주는 무미건조한 음성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고 나서도 마리가 미심쩍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린이 재빨리 오버로드의 문을 연다.
타요. 멀지 않은 곳에 체류자 마을이 있거든요. 꾸물거려 봐야 좋을 게 없어요.
결국 마리는 주변을 한번 둘러본 다음 트렁크를 질질 끌면서 오버로드로 다가간다. 린의 도움을 받아 트렁크를 오버로드에 싣고 린의 맞은편 자리에 앉는다.
알파, 출발해.
린이 명령하자 오버로드의 문이 소리 없이 닫히고, 이제껏 달려왔던 방향을 향해 다시 부드럽게 굴러가기 시작한다.
마리의 혀 위에서 온갖 질문들이 맴돈다. 린이 자신을 우주정거장까지 어떻게 데려다줄 계획인지, 어디 소속인지, 칼이 자신을 어떻게 소개했는지, 혹시 린도 자신과 함께 왕복선을 탈 예정인 것인지. 몸이 조금 흔들리기만 해도 하나쯤 입술 밖으로 튀어나갈 것 같은데, 오버로드는 안에 카드로 만든 탑을 쌓아두어도 끄떡없을 만큼 매끄럽게 질주하고 있다. 보기보다 성능이 좋은 모듈을 탑재한 모양이다.
끝내주죠?
린이 먼저 말을 건다. 마리는 조금 놀라서 뒤늦게 되묻는다.
프랑스어를 하시네요?
아주 조금. 동료에게 배웠어요.
린은 거기까지 제법 유창하게 말한 다음, 마리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덧붙인다.
그 친구가 35퍼센트쯤 프랑스인이었거든요.
이어피스가 다시 통역을 시작하면서 린의 목소리를 지워버리자 마리는 살짝 아쉬움을 느낀다. 린의 목소리에는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는 것 같은 경쾌한 힘이 실려 있었다. 음성 정보가 어느 정도 누적되면 이어피스가 린의 목소리를 모방한 음성을 합성해내겠지만, 상대방의 성대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는 것과 귓속에서 바로 고막에 전달된 소리를 듣는 것은 확실히 차이가 있다. 후자 쪽은 아무래도 냄새가 제거된 캡슐푸드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물론 겨우 그 정도의 아쉬움 때문에 외국의 언어를 직접 배우려는 사람은 얼마 없지만.
그런데, 뭐가요?
네?
뭐가 끝내준다는 거죠?
아, 우리 프로젝트 말이에요. 당신도 그걸 무척 기대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마리는 자신도 모르게 조금 웃는다. 그렇게 말할 것까지야.
프로젝트라니 너무 거창하네요. 지구에서 놓친 왕복선을 잡아타려고 우주정거장까지 쫓아가는 것뿐인데요 뭘.
하지만 자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마리는 뭔가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는다. 린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묻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미소 짓던 마리의 입매가 살며시 오므라든다.
무슨 소리예요, 마리. 우리 지금 파프리냐를 찾으러 가는 거잖아요.
파, 파프리냐요?
혹등고래요. 지구상의 마지막 혹등고래가 될지도 모르는 그 유명한 파프리냐 말이에요.
마리의 얼굴에서 급격하게 핏기가 사라진다. 린이 깜짝 놀랄 정도로.
그, 그럴 리가요. 분명히 칼이, 그건 취소라고, 나를 20차 그룹에 넣었다고, 탑승 일정이 꼬였으니 우주정거장까지만 따로 오라고, 이주 관제팀에서 픽업 비행정을 보내줄 거라고...
마리가 당황해서 횡설수설하자 린이 미간을 찌푸린다. 귀를 만지작거리며 잠시 고민하더니, 마침내 착잡한 얼굴이 되어 말한다.
칼이 누군지는 몰라도, 당신 보스겠죠, 당신을 제대로 물 먹였네요.
...무슨 말이에요?
20차 왕복선은 우주정거장을 거치지 않아요. 우주정거장 스태프 전원이 19차 그룹에 들어갔거든요. 우주정거장은 이미 폐쇄됐어요. 20차 왕복선은 화성 궤도에 지어 놓은 임시 정거장을 쓸 거예요. 마리, 세이건 행 정기 왕복선은 이제 다 떠난 거예요. 아직 지구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후발대로 갈 거예요.
후발대라면...
아직 끝나지 않은 일들을 처리하고 최후에 떠날 사람들이죠. 2년 뒤에요.
2년 뒤라.
마리의 혓바닥이 바글바글 끓어오른다. 오랫동안 억눌러 왔던 말들이 마침내 입술을 비집고 나와 허공에 폭발한다. 칼, 이 개망나니, 저주받을 악마의 똥구멍 같은 새끼야!
마리는 부들부들 떨리는 자신의 주먹을 내려다본다. 갑자기 풉, 하는 소리가 나서 고개를 들어 보니 린이 필사적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있다. 웃음 때문에 금방이라도 얼굴이 뻥 터져버릴 것 같지만 린은 경이로운 의지력으로 이를 억누른다.
한참 뒤, 간신히 위기를 넘긴 린이 새빨개진 얼굴로 중얼거린다.
미안해요.
...아니에요.
욕이 너무 웃겨서 그만.
린이 헛기침을 한다. 침묵이 두 사람의 발목부터 찰랑찰랑 올라온다. 차라리 정신없이 덜컹거리면 좋을 텐데, 멀미도 하고 말이야. 지그시 숨을 참으며 마리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