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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아리 Aug 08. 2023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고

언젠가는 읽어야겠다고, 응당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언제일지는 모르겠으나 반드시 읽긴 할 것이라고 믿는 책들이 있다. 박경리의 <토지>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같은, 읽을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게으른 나머지 자꾸 뒷전으로 밀려나는 책들 말이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내겐 그런 책이었다. 어쩌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내가 언젠가는 꼭 읽을 거라고 다짐했던 최초의 책일 것이다. 그리고 그 다짐의 시기가 초등학교 저학년쯤이었다는 것은 꽤 놀라운 사실이다.


다짐의 전말은 이러하다. 당시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는 시골에 집과 작은 농장을 마련하시고 가끔 들러 작물을 가꾸고 쉬시곤 하셨다. 부모님과 나도 종종 그 집에 함께 갔는데, 그곳의 창고엔 엄마나 아빠의 오랜 짐들 중 갈 곳 없는 짐들이 쌓여있었다. 그중 엄마가 젊은 시절 읽으시던 책들이 여러 권 있었는데, 그 책무더기에서 나는 양귀자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에릭 시걸 <닥터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등 뭔가 재밌어 보이는 책들을 골라 집으로 가져왔었다. 그것들은 너무 오래돼서 종이가 노랗게 바랬고 페이지 위에는 눈곱만큼 작은 책벌레들이 기어 다녔다. 또,  '~했읍니다', '~하오?' 등의 옛날 말투로 번역되어 읽기 쉽지 않았다. 그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당시 어렸던 나도 제목이 굉장히 철학적이라고 생각했으며 당연히 어렵고 진부한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하고 (골라왔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읽지 않았다. 다만, 어떤 존재가 가벼운 게 참을 수 없다는 건지, 참을 수 없는 어떤 존재가 있는데 그게 가볍다는 건지 제목이 다의적으로 읽혀 그 진짜 뜻을 고민해보기는 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을 수 있었던 두 번째 기회는 20대에 찾아왔다. e-book으로 전공서적 원서를 다운로드하다가 영어공부 할 겸 소설 몇 권을 함께 저장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였던 것이다. 어려워 보여서 읽지 않았던 책을 영어로 읽으려고 하다니. 시도는 좋았으나 또다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나에게 읽히지 못한 채 남겨졌다. 세 번째 기회는 재작년에 있었다. 회사 지원금으로 책을 몇 권 살 수 있었는데, 엄마의 오래된 버전 말고 새로운 버전으로 깨끗하게 읽자고 다짐한 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신판을 구입했다. 그리고 그 책은 우리 집에 온 후로도 2년간 읽히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게을렀던 것이다.


올해 7월 밀란 쿤데라가 별세했다. 살아계실 때 읽어볼걸..라는 후회가 잠시 들었다. 그의 책을 한 권도 제대로 읽지 않았기 때문에 내 추모가 진실되지 않다고 느꼈고, 조만간 정말 꼭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2주 전, 처음 만나는 사람과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밀란 쿤데라가 나왔다. 그 사람이 말했다. "밀란 쿤데라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더라고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저의 인생책이에요. 처음 읽었을 때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됐지만 문장 하나하나가 음악처럼 느껴졌어요. 어떻게든 이해하고 싶어서 이야기를 문단 단위로 나눠 읽고 이해하려고 했어요. 지금도 책 전체를 완전히 이해하진 못했지만, 최고의 책인 것은 분명해요." 아뿔싸, 나는 아직 그 책을 읽지 않았는데,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는 말은 내가 먼저 꺼냈는데, 이렇게 대단한 책을 내가 읽지 않았다는 것을 시인해야 한다니..? 얼떨결에 나는 그 책을 읽은 척하며 동조했다. "맞아요, 정말 대단한 분이셨고, 엄청난 책이죠. 저도 재밌게 읽었습니다." 최악이었고 위선 그 자체였으며 허세뿐인 답이었다. 나는 그날 저녁 그때 그렇게 답한 것을 집에서 혼자 매우 후회했다. 그리고 속죄를 위해서라도 나는 당장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어야만 했다. 또, 문장 하나하나가 음악 같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궁금했고 빨리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이번주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드디어(!) 읽기 시작했다. 한번 읽기 시작하니회사에서 일할 때도, 점심시간에 다른 사람들과 밥을 먹을 때도 한 시 빨리 집 가서 이 책을 마저 읽고 싶다고 생각했다. 너무 재밌어서 심지어 며칠 만에 다 읽어버렸다. 어릴 때의 내 예상이 틀렸다. 이 책은 어렵지도, 지루하지도, 진부하지도 않았다. 읽을수록 얼른 끝까지 다 읽고 싶은 마음이 드는 책이었다.


일단, 소설의 구성이 특이하다. (잠깐, 이게 정말 소설이긴 한가? 소설에 작가의 에세이적 통찰이 포함된 것인가, 아니면 작가의 에세이를 위해 소설의 형식을 빌린 것인가?) 작가는 자신의 철학적 사유를 풀어내는가 싶더니 소설 속 주인공을 꾸며놓고 그들을 이야기로 끌어들인다. 사건이 전개되고 작가는 그 인물들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와 각 인물들을 창조하는 과정에 대해 직접 설명하기도 한다. 작가는 소설 속에서 직접 '내 소설의 인물들은 실현되지 않은 나 자신의 가능성들이다'라고 말하며 자신이 늘 생각했던 것을 또 다른 형식으로 발현한 것이 소설의 주인공들이라고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소설은 작가의 고백이 아니라 함정으로 변한 이 세계에서 인간 삶을 찾아 탐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는 자유자재로 소설 안을 들어갔다 나왔다 하며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다가, 인물들의 마음을 말하다가, 당시의 역사적 사건을 알려주기도 한다. 각 인물 간의 관계와 그들 사이에서 얽혀있는 사건, 그리고 이에 대한 작가의 사유가 융합되어 독자가 놀랍도록 잘 이해할 수 있게 설명된다. 또, 인물의 마지막 모습이 소설 중간에 설명되는 등 소설의 사건은 시간의 순서대로 흘러가지 않으며, 소설에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 아무렇지 않게 제3자의 입을 통해 흘리듯 발설되기도 한다. 그리고 책의 각 장은 여러 부분으로 쪼개져있는데, 쪼개진 부분의 분량이 짧은 편이라 읽는데 지루하지 않고 금세 읽을 수 있다. 작가는 책 전반에서 철학, 역사, 예술을 총체적으로 아우르고 시대를 통찰하여 인간의 감정을 전달하며 이 모든 과정이 딱딱하거나 어렵지 않다는 것이 놀랍다.


밀란 쿤데라의 그림과 손글씨로 꾸며진 개정판. 강아지가 표지에 있는 이유가 궁금했는데, 소설 속 카레닌을 그린 것이라고.


소설 속 이야기와 작가의 담론은 키치에 대한 부분에서 절정으로 치닫는다. 키치가 나오기 전까지 작가는 마음 좋은 동네 아저씨처럼 듬성듬성 글을 펼치고 느슨하게 이야기를 전개한다. 글을 읽는 독자는 이러한 분위기에 휩쓸려 마음을 풀고 설렁설렁 이야기를 따라가게 된다. 그러나 키치에 이르러 작가는 숨겨둔 칼을 꺼낸 후 반짝이는 눈으로 느슨했던 서사를 체코의 역사와 자신의 철학적 담론과 함께 순식간에 이야기 산의 꼭대기에 올려놓는다. 특히, 소설 속 인물들이 캄보디아에서 행진할 때 작가가 마련한 장치들은 미리 설치해 둔 시한폭탄처럼 다 함께 폭발한다. 그 과정이 사뭇 진지하면서도 웃겨서 읽는 도중 소리 내어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는 틀림없이 코미디에 일가견이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고차원의 능청스러운 블랙코미디를 선보일 수는 없다. 내가 특히 웃은 소설 속 대목은 캄보디아 행진에 대한 간담회 장면이다. 미국인들이 영어로 회의를 주도하는 것에 반감을 가진 프랑스인들이 불어 통역을 요구했는데, '프랑스인들도 영어를 이해해서 통역관의 말을 가로막아 고쳐 주고 단어 하나하나에 시비를 걸었기 때문'에 회의시간이 두 배 이상 길어졌다는 부분에서 나는 폭소했다. 여기서 프랑스인들의 불만은 고조되어 미국인들이 카터 대통령을 언급하고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캄보디아 행진을 한다고 성명했을 때 어느 프랑스 의사는 자신이 '공산주의에 항의하러 온 것이 아니라 (캄보디아 내전 희생자들을) 치료하러 온 것'이라고 외치는데, 이때 '미국인 스무여 명은 공감하는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바라보았고 그들 중 몇 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다. 왜냐하면 미국인들은 '집단적으로 환호하는 순간에 유럽인들이 무의식적으로 이런 행동을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캬. 이 부분에서 나는 대폭소했다(ㅋㅋㅋㅋㅋ을 연달아 치고 싶은 마음이다). 캄보디아 행진 막바지에 이르러 행렬 맨 앞으로 뛰어가는 미국 여배우, 카메라를 향한 그녀의 눈물, 지뢰로 갈려나간 기자의 몸뚱이와 피 뭍은 흰 깃발, 고조되는 경건함, 그리고 다리 끝에서 외친 평화적 행진 요구에 아무 대답 없던 반대편 다리 끝의 고요함까지, 캄보디아에서 교차되는 인물들의 행동과 내면 묘사는 독자로 하여금 몸에 전율을 일으키는 명장면이다.


소설을 다 읽고 나니 사실은 나도 키치를 혐오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간혹 주변에서 세계평화, 빈곤퇴치, 민주주의 발전 등 거대한 명제를 품에 안고 그것을 삶의 방향으로 설정한 후 유난스럽게 자신의 목적을 외치는 사람들을 만난다. 이들은 틈만 나면 자신의 이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이 어떤 이상을 가지고 있는지부터 파악하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이상과 반대되는 얘기를 하거나 같은 이상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를 속으로만 생각하고 남들을 설득하지 않는 것은 위선자이며 소시민이고 겁쟁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을 만날 때면 난 항상 의아했다. '세계평화, 빈곤퇴치, 민주주의 발전은 모두 내가 원하는 것도 '좋은' 것인데 난 왜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을까?' 또는 '왜 난 이들처럼 내 인생의 방향을 담대한 뜻으로 무장하고 옳음을 향해 내달리지 못할까? 내게는 왜 그런 열정이 없을까?'라고 스스로 의문하고 자책하기도 했다. 그들의 존재를 거북하게 느끼는 내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내가 느낀 거북함과 혐오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어째서 그들과 같이 있으면 불편한 마음이 들었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밀란 쿤데라가 말하는 그들의 '대장정'에 나는 동참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소설 속에서 화가인 사비나는 러시아에게 탄압받는 체코인이지만 그녀의 작품이 정치적으로 해석되길 원치 않는다. 그녀가 체코인이므로 거대한 '대장정'에 당연히 동의할 것이라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녀는 '나의 적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키치'라고 외치며 (그녀의 정의에 따르면) 조국을 '배반'한다.


그렇다면 '대장정'은 무엇인가?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대장정을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어 우정, 평등, 정의, 행복을 향해 멀리 나아가는 노정'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대장정은 '좋은 것'이 아닐까? 그러나 밀란 쿤데라는 예시를 덧붙인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인가 아니면 민주주의인가? 소비사회 거부인가 생산 증대인가? 단두대인가 사형제도 폐지인가? 이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좌익인사를 좌익 인사답게 만드는 것은 이런저런 이론이 아니라 어떤 이론이라도 대장정이라 불리는 키치 속에 통합하는 능력인 것이다.' 그렇다. 우정, 평등, 정의, 행복이 문제인 것이 아니다. 대장정 그 자체, 오직 대장정이어야만 하는 그 모든 담론, 그것이 키치이며 모든 문제의 원흉이다.


작가는 키치에서 소설을 절정으로 이끌었지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키치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오히려 이 소설은 인간의 삶과 그러한 인간이 속한 역사, 덧없는 남녀 간의 감정에 더욱 초점을 맞췄다고 할 수 있다. 가장 최근에 민음사에서 발간한 개정판 소설의 표지는 밀란 쿤데라가 직접 그린 강아지와 그의 손글씨로 장식되어 있는데, 그 강아지는 소설 속 토마시와 테레자가 키우던 개 카레닌이라고 한다. 카레닌은 귀엽긴 하지만 그저 개일뿐인데 어째서 표지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지 궁금했는데, 소설 마지막 장인 '카레닌의 미소'를 읽고 나서 그 의미를 깨달았다. 카레닌이야말로 소설 맨 첫 장에 언급된 니체의 영원회귀론(모든 역사와 존재는 무한하고 동일하게 반복된다는 사상)에 대해 답할 수 있는 존재이므로 표지의 주인공이 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작가는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지은 후 천국에서 추방되었을 때 동물은 추방되지 않았고, 이러한 인간과 동물의 차이로 인해 오직 동물만이 인간에게 전원시를 선물할 수 있다고 한다. 작가에 따르면 '인간과 개 사이의 사랑은 전원적이다. 갈등이나 가슴이 메이는 장면, 진화 같은 것이 없는 사랑이다. 카레닌은 토마시와 테레자 주위로 반복에 근거한 삶의 원을 그었고 두 사람도 그에게 같은 일을 해 주길 기대했다.... 인간의 시간은 원형으로 돌지 않고 직선으로 나아간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이기에, 인간이 행복할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어쩌면 니체는 카레닌이 이미 알고 있는 행복의 방법을 깨달은 유일한(또는 최초의) 인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방법을 깨달았을지라도 니체 역시 인간이기에 끝내 행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불행할 수밖에 없는 비극적인 존재인가? 아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니체의 영원회귀론을 앞세우고 인물들이 시간에 지남에 따라 삶의 가벼움을 느끼며 방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허무주의소설 같지만, 사실은 그 가벼움 속에 하루하루 무거운 인간의 일생을 보여주는 뼈저리게 실존주의인 소설이다. 한없이 가벼운 역사의 양팔저울에 삶을 내던져도 그 삶의 무게는 너무도 가벼워 저울의 균형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밀란 쿤데라가 말했듯이 '인간은 가장 깊은 절망의 순간에서조차 무심결에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작곡'하는 것이다. 수많은 일들을 겪은 토마시와 테레자는 마지막장에서 시골로 이사한 후 그들의 지난 삶을 되돌아보며 무거움과 가벼움을 동시에 느낀다. 인생의 가벼움이 덧없으면서도 그들이 함께 춤추고 있다는 행복함. '슬픔은 형식이고 행복이 내용인' 그들의 순간을 목격하고 나도 울컥했다.


밀란 쿤데라는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의 모순이 가장 신비롭고 미묘하다고 설명한다. 둘 중 무엇이 더 긍정적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소설 속 인물들의 삶은 때로는 무겁고 때로는 가볍다. 삶이 놓인 시간과 장소에 따라 그 무게가 시시각각 변할 수 있을까? 우리는 끊임없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만 Es mus sein, 어쩔 수 없다. 그냥 지금 놓인 순간을 살며 슬플 땐 슬프고 행복할 땐 행복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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