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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아나 Sep 16. 2022

글을 통한 혁명가 리영희의 삶을 들여다보다

‘진실에 복무하다’를 읽고

“나는 이제 공자의 삶에서 노자의 삶으로 돌아가고 있어요...... 군자의 미덕으로 삼았던 논어적 삶을 떠나려 하는 것이죠...... 내면을 바라보면서 우주의 원리를 찾고 그 원리 속에 일체화하는 노력을 하면서 살려고 해요.”


 최근 언론의 행태를 보면 결코 좋은 말이 쉽게 나오질 않는다. 거짓 기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보내는 건 양반이요, 악의적인 제목과 자극적인 내용으로 국민들을 현혹시키고 있다.

 국민들의 눈과 귀를 망가뜨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기레기’에 비교가 되는, 결코 불의에 굽히지 않는 참 언론인이라고 할 수 있는 ‘리영희’님의 평전을 읽게 된 것은 과히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깐깐하고 배짱 두둑한 모습은 어머니를 닮은 것이 아닌가 싶다. 1964년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제안준비]라는 기사로 인해 수사를 받은 아들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가 담당 검사의 뺨부터 때렸다는 대목에서 감탄을 자아냈다. 멋지다. 우리 아이들도 당당하게 키우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한 계속해서 자식을 걱정하는 아비의 마음을 이 세상을 떠난 후에야 일기장을 통해 깨달은 아들, 리영희. 사랑과 헌신으로 자식을 키운 부모가 있었기에 대 인물이 자라난 것 같다. 

 끊임없는 도전과 배움, 공부에 매진하는 모습이야말로 나약해지고 있는 내 정신 상태에 불을 붙인 것 같다. 책을 읽는 내내 내 자신이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부모로서의 다짐, 한 인간으로서의 성찰, 한 국민으로서의 당당한 목소리를 낼 것을 깨우친 것 같다.

 리영희의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항상 주위에 좋은 사람들이 함께 한다. 

 예로 그가 통역장교로 일하는 동안 만난 메인소령은 중상을 입은 병사가 처벌까지 받아야 할 상황이 되자 모른척하지 않고 소리를 높였다. 리영희는 이 모습에서도 휴머니즘을 생각했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을 거의 대부분은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거창민간인학살 사건’은 이번에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이 묻히지 않은 것도 기자들 덕분이었다. 어디든 필요한 기자, 기자가 필요하다. 기레기가 아닌 기자.

 리영희 삶은 참으로 다사다난했다. 쉽게 흘러가는 법이 없었다. 그 삶에 따뜻한 연이 있다면 바로 아내였다. 첫 만남에서 에스코트를 배려있게 했던 통에 좋은 인연이 된 것이다. 

 올곧은 남편 때문에 고생도 많이 했을 터이지만 끝까지 옥바라지며 가족과 남편을 간수했다.   우리네 엄마들은 모두 이런 삶이었을까? 

 리영희가 ‘드디어’ 기자가 된 것은 합동통신 기자 모집공고를 보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말 다행이다. 이런 인물이 기자가 된 것에 참으로 다행이다.

 오로지 진실에만 복무하겠다는 신념, 이것이야말로 요즘 기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이 책은 한국역사의 표본이 아닐까 싶다. 

 현재는 대구가 심각한 보수집단으로 표현되지만 4.19가 있었던 때만 해도 학생들이 분노하고 선두에 나서 시위를 했고 결국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랬던 대구가 요즘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참으로 안타깝다.

 5.16 쿠데타가 일어나고 미국에 그 사건에 대해 기사를 보냈다. 주위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을지도 모를 상황에서도 기사를 썼고, 발간했다. 

 읽어주는 대로 받아쓸 기자가 아닌, 기사를 던져주기를 기다리는 기자가 아닌, 6시 퇴근시간에 불렀다고 징징거리지 않을 기자가 이 땅엔 필요하다.

 현대사회에서도 계속 회자되고 있는 김재규 의사의 희생은 참으로 감사하다. 악의 축인 박정희는 물불가리지 않고 그냥 잡아가뒀다. 양심적 지식인까지. 이 시대에 꿋꿋이 살아왔던 국민들, 내 부모님, 선생님, 감사하다.

 리영희가 조선일보에 입사를 했다는 대목에서 예전에는 조선일보가 그래도 정상적인 신문사였나보다. 지금 조선일보는 어떤 식으로 신입기자를 뽑을까? 혹독한 훈련을 통해 거짓기사만 배설해 내고 있는 조선일보가 한심하다.

 다행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곧 조선일보를 나오게 되었다는 대목에서 왜 안심이 되는 걸까?

 ‘정확한 호명, 정명, 진실에 접근하고 진실을 복원하는 시작점’이라고 일컫는 리영희 정명 중시사상도 배울 점이다.

 이만큼 리영희의 글과 기사가 선동성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구체적 증거와 자료제시, 어려운 관계를 쉽게 풀어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려운 말만 그득한 기사를 국민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쓰는 것도 기자의 능력이다.

 인간적인 면모, 권위적이지 않고 즐길 줄 아는, 그리고 어려운 이에게 도움을 줄줄 아는 리영희의 삶을 읽으니 꼭 한 번 뵙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글로서나마 만날 수 있음에 감사하다.


 ‘티가 있다는 것은 눈에 티가 끼어 있다는 뜻이며, 밖에 있는 티를 못 보는 것은 마음의 눈에 티가 끼어 있기 때문임을 깨닫게 되었다.’ 라는 깨달음을 감옥에서 할 수 있을까? 

 구더기가 나오고 빛 한 줌 들어오지 않은 그런 쪽방에서 깨달음을 얻은 그의 삶을 돌아보며 이제는 노자의 삶을 살고 싶다는 그의 바람이 하늘에서는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현생에 남아있는 자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글귀와 자료들을 남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주)창비 주관,  <리영희를 읽다, 리영희를 쓰다> 글쓰기 대회 장려상 수상작. 2021.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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