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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설 Jan 03. 2023

나의 구원자를 그리워하며

내 사랑스러운 친구에게

TO. 은수


은수야, 오지 않을 것 같던 2023년이 밝았어. 널 만난 게 벌써 4년 전이었다니. 언제 이렇게 시간이 지나버렸을까. 지금 여기는 매일 시린 바람이 부는 겨울이야. 너와 함께 뜨겁게 땀을 흘렸던 여름이 그리워질 만큼 바람이 매섭다.


요즘 나는 너에게 참 감사해. 너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평생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을 거야. 네가 그랬지. 주머니에 구멍이 나있는지도 모르고 일단 뭐든 넣고 보는 사람이 나라고. 그 말을 듣곤 그냥 웃어버렸는데, 나중에서야 이해가 되더라. 난 아무런 결핍이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늘 채워지지 않았고, 지금의 겨울처럼 차가운 바람이 불었지. 네 말처럼 왜 뻥 뚫려있는지도 모르고, 그저 이런저런 감정들로 채우기 바빴어.


그래서였을까. 20대 때 나를 제일 괴롭게 했던 건 관계였어. 사람 사이의 미묘한 감정을 교류하는 일은 나를 성숙한 인간으로 만들어줬지만, 그 과정은 소모의 연속이었지. 잔잔한 파도 같던 삶에 누군가 들어오면 불편한 설렘을 느꼈어. 기쁨도 잠시 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나를 계속 지치게 했고, 결국 나는 동굴로 들어가 버리곤 했다.


사실 나는 사람을 좋아하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녔던 거야. 좋아하는 만큼 기대하고, 기대가 채워지지 않으면 실망하고, 또 기대하고... 혹시 마음이 많이 배고프냐고 물어보던 네 말이 정답이었어. 지독하게 굶주린 사람처럼 뭐든 소화시키려 했으니까. 사랑을 주는 일엔 참 인색했으면서. 이기적이었지.


은수야, 관계의 느슨함을 잘 아는 네가 정말 부러웠어. 누구보다 시니컬하지만, 정 많은 따뜻한 사람. 배려하고, 배려받을 줄 아는 모습까지. 어른스럽다는 표현은 바로 너를 보며 하는 말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피하고 싶은 본인의 어두운 단면까지 인정해버리는 너를 보면서 배웠어. 그래, 그저 가볍게 비워두자. 억지로 채우려면 탈만 나지. 그저 원하는 바를 욕망하기만 해도 만족할 수 있다, 나를 먼저 인정하자.


은수 네가 그랬지.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고. 완벽한 사람처럼 보이게 애쓰지도, 타인에게 완벽함을 바라지도 말라고. 채우기보다 비우기에 더 집중하라고. 급한 마음이 들 땐 머릿속으로 신호등의 빨간불을 그리고, 심연에 빠질 땐 언제든 다시 떠오를 수 있게 구명조끼와 보트를 미리 구비해 놓으라고. 때로는 뇌가 청순한 사람처럼 굴어도 된다고. 사람들은 은근 미친년을 좋아한다고. 아직도 난 네 말을 경전처럼 다 기억한다.


분명 너는 부담스러워할 테지만, 은수 너는 나의 구원자야. 이건 확실해. 진정한 나를 알게 해 준 사람. 새카만 숲 속에서 길을 잃어도, 언제든 길을 찾을 수 있는 내 인생의 나침반.


말보단 글이 편하고, 말보단 행동이 앞서는 너를 나도 닮아간다. 하루하루 진해지는 네가 남긴 흔적에 감사해. 성장한 나를 보면 너는 또 어떤 이야기를 해줄까. 멀지 않은 미래에 또 만나자. 내 분신.


재회할 날을 기다리며.

FROM. 너의 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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