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읽기(1)-고향집에서(1)

들어가는 말

by 이제월

<고향집에서> 해명(解明)



들어가는 말


해명에 대하여 이야기하겠다. 해명은 단순한 해석과 다르다. 단순한 해석은 그것의 올바름을 주장할 때조차 다른 해석을 인정한다. 그러나 해명은 올바름을 주장할 때 그것을 철회할 권리가 없다. 그 올바름은 그 인식을 배경에 두지 않고 본래 질서를 뿌리에 놓기 때문이다.

하나의 메시지가 전달될 때 우리는 발신자와 수신자를 나누어 볼 수 있다. 그것이 말이든 글이든 그림이나 음악, 몸짓, 색깔이든 어떻든 발신자의 메시지를 M1이라 부르고 수신자의 메시지를 M2라고 부른다면, 기실 둘은 동일한 것이지만 사실에 있어 M1과 M2는 불일치한다. 왜냐하면 M1과 M2는 사실 수신자와 발신자 각각의 영혼에 새겨진 것이기 때문이다. 각각의 정신은 자신이 뜻한 바를 말하되, 그 메시지는 반드시 어떤 매개(medium)를 갖는다. 매개의 속성은 다른 여러 발신자와 수신자가 겸용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하나의 기호는 여러 개의 의미를 갖게 되고, 의미의 미세한 차이가 발생한다. 그 미세한 떨림은 날카롭게 구분되기보다 뭉뜽그려 번져 있기 때문에 이 상태로는 애써 더 말하려 해도 정확히 말하여질 수 없다. 메시지 전달의 성공은 대개 발신자와 수신자 양쪽이 이미 그 메시지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을 때 기대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수다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됐을 거라고 기대할 수 없다. 결국 우리는 모르는 것을 아는 자로부터 얻어내려는 노력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모르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은 대단한 착각이다. 모르는 것은 언제나 모르는 채로 남아 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을 배울 수 있다는 생각은 오만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절망해야 하는가? 우리에게는 한 가지 길이 남아 있다. 그것은 ‘모르는 사람’에서 ‘아는 사람’으로 되태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자기 존재를 바꿈으로써 무언가를 이해하고 인식의 지평을 넓혀 나간다.

메시지를 통해 변화를 끌어내는 것은 메시지 자체의 힘이 아니다. 메시지를 먹으러 달려든 자가 덫에 걸리는 것처럼 사로잡히는, 피할 수 없이 경험하게 되는 무엇의 힘이다. 그 무엇은 메시지 자체가 아니라 메시지를 둘러싸고 있으며, 해당 메시지가 읽히는 범위를 정하고, ‘그것을 그것-이게’ 한다. 그것을 그것으로만 보는 동안 우리는 그것을 내 식대로 해석하지만,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것을 마주치면 거기 삼켜져 다른 존재가 된다. 우리는 처음으로 그것을 분리하여 내 틀 속에 집어 넣는 대신 본래 주어진 대로 그것이 자리해야 할 곳에 그것을 둘 수 있다. 이때 고려할 수 있는 문제는 수신자뿐 아니라 발신자도 자신이 송신한 메시지에 대하여 무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거의 모든 경우에 발신자 역시 수신자 못지 않게 무지하다. 왜냐하면 메시지는 이미 ‘읽힌’ 것이기 때문이다. 읽혔기 때문에 ‘쓰인’ 것이다. 발신자는 어느 메시지를 읽었으며, 그래서 그 메지지를 쓸 수 있었다. 인간의 언어로나 감각의 경험으로나 세계의 주어진 법칙들에 의해서나 그는 타고난 대로 혹은 타고난 것처럼 보이는 대로 세계를 전시하고 있으며, 이미 쓰인 메시지로서 메시지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통상적 의사전달 구조에서 발견하고 고려하는 M1과 M2를 넘어서 M1 이전에 자리한 M0(메시지 제로)와 마주친다. 그리고 진짜 메시지는 언제나 제로 메시지다.

20세기에 인류는 소쉬르, 촘스키, 레이코프에 이르는 환상적인 언어학적 풍년을 맞이했다. 그리고 이는 언어의 자의성, 생태 문법, 은유라는 열쇠말들과 함께 언어뿐 아니라 인간 정신에 대한 신경학적 연구에 해석을 제공할 만큼이나 강력한 인식론적 이해를 더해 주었다. 이 연쇄들은 극복할 뿐 아니라 상보적으로 지양(sublation/aufheben)된 관계인데 마치 아이가 어른이 되면서 동일한 사물을 전혀 다르게 점차 온전하게 이해하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는 그렇게 인간 정신,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를 키웠다.

언어가 은유라고 할 때 사실은 모든 것이 은유인데, 인간은 좀더 쉬운 것으로부터 좀더 어려운 것을 이해하고자 한다. 그런데 ‘삶은 여행’이라는 구조가 있으면, 우리는 여행자, 쉼터, 짐, 경로 등과 같은 다른 상징들을 함께 동원하게 되고, 그것이 그것대로 이해를 풍부하게 해준다. 물론 그만큼 오독과 오해도 풍성해진다.

해명 작업은 하나의 텍스트, 메시지가 위치한 콘텍스트를 우연적인 차원에서만 아니라 필연적인 차원에서 밝혀 내는 것으로서 이 추출이 의미하는 바는, 발신자가 무어라고 생각하든 그 메시지의 본래 진면목[제로 메시지]은 무엇일-수밖에-없다[不得而]는 것이다. 그 질서는 발생시에 이미 필연일 수도 있고, 발생시에는 우연일지라도 발현된 뒤에는 - 그것이 이미 그렇게 결정(結晶, crystalization)되었기 때문에 - 결정(決定)된 것으로서 필연이다. 좀더 섬세하게 표현한다면 이미 결정된바, 역사다(혹은 사실이다).


해명 작업은 보물선을 찾는 침몰 선박 사냥꾼과 같다. 많은 것들이 그 작업이 중턱에 이를 즈음 또는 거의 끝날 때가 되어서야 아무것도 건질 게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것은 인간의 ‘거짓말’ 때문인데, 도덕적으로 거짓말이 아닌 때라도 형이상학적으로 거짓말일 수 있다. 또는 사실들을 나열하지만 질서를 감추는 거짓된 ‘태도’가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인간은 무지 혹은 태도로 인해 거짓말을 선택한다. 그는 거짓말 기계로서 거짓말을 노래하기에 그의 메시지는 고귀한 것으로 전시될 수도, 투박하여 진실된 것으로 전시될 수도 있으나 어느 쪽이든 우리를 한치 앞으로도 데려다 주지 않는다. 우리는 거짓말을 타고는 ‘모르는 사람’에서 ‘아는 사람’으로 바뀔 수 없다. 전이[transiton]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기보다 어렵게 다다를 수 있다.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횔덜린이라는 풍부한 보고를 발견했다. 릴케도 그러하다. 이런 빼어난 시인들은 그들의 시에서 이승뿐 아니라 저승을 보여 준다. 그들은 우주의 비밀을 가장 깊이 훔쳐다 우리 앞에 엿보인다. 물론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다. 그것을 아는 사람이 되기까지는. 그러므로 그것을 알 수 있는 경우의 수를 확장하는 것, 대도무문이라고 하였으니 어디서든 시작해서 문을 세우면, 누군가는 두드리라 - 열릴 것이다.

<고향집에서>는 안치환이 시를 쓰고, 노래를 붙인 뒤 직접 불러 발표한 곡이다.

<고향집에서>의 노랫말은 이러하다.


<가>

참 오랜만에 돌아온 내 고향

집 뜰엔 변함없이 많은 꽃들

기와지붕 위 더 자란 미류나무

그 가지 한구석엔 까치집 여전하네

참 오랜만이야


<나>

낯선 사람 보듯 짖어대는 누렁아

나도 이 집에 한 식구란다

아침마다 너에게 밥 주시는 어머니 아버지

그 두 분의 사랑하는 막내아들

나도 한 식구란다


<다>

너무 오랫동안 잊고 지낸 탓일까

너무 오랜동안 바라던 탓일까

오늘따라 다르네 여느 때와 다르네

워... 워... 워... 워...


<라>

사랑방 부엌엔 쇠죽 쑤시는 할아버지

정정하신 할아버지 오래 사세요

고추잠자리 따라 뛰노는 내 조카들과

아직 뭘 잘 모르는 두살짜리 내 아들의

어울림이 좋은 날이야


<마>

옹기종기 모여 앉아 송편 빚는 며느리들

이런 얘기 저런 얘기 시간은 흘러가는데

적적하던 내 고향집 오늘은 북적대지만

우리 모두 다 떠나면 얼마나 외로우실까

또 우실지도 몰라....


<다> 반복


<바>

참 오랜만에 돌아온 내 고향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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