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이에게 | 달빛독서

그리고 에일리언이 있었다 — 에일리언 시리즈에 관한 생각 조각들

by 이제월

지난해 에일리언 시리즈 최신작 <에일리언: 로물루스>가 나왔습니다. 이 작품은 스페이스 호러라는 장르를 알린 작품이자, 리들리 스콧이라는 거장 감독에 의해 태어나 제임스 카메론이라는 또 다른 거장의 속편을 거쳐 이 분야의 상징 같은 작품이 되었습니다. 또한 이 작품 촬영 당시 알려지지 않은 배우였던 시고니 위버는 여전사 캐릭터의 시조 격이고, 최근 개봉한 <아바타: 불과 재>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현역으로 활약하며 강함과 끈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에일리언 VS 프레데터>처럼 양쪽 캐릭터 모두를 값싸게 소비한 작품은 제외하고, 여기서는 <에일리언>, <에일리언 2>, <에일리언 3>, <에일리언 4> , 프로메테우스, <에일리언: 커버넌트>, 그리고 최신작 <에일리언: 로물루스>만을 다루겠습니다. 우선 최근작의 생소한 이름, ‘로물루스’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로물루스라는 이름이 불러오는 오래된 질문


로물루스는 잘 알려져 있듯 로마 건국 신화의 인물입니다. 그는 쌍둥이 형제 레물루스를 죽이고 도시를 세웁니다. 문명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합의가 아니라 살해로, 공존이 아니라 제거로. 이 신화가 불편한 이유는 단순한 폭력성 때문이 아니라, 문명이 언제나 ‘어떤 죽음 위에 세워졌는가’를 묻기 때문입니다.


에일리언 시리즈가 ‘로물루스’라는 이름을 호출하는 순간, 이 시리즈는 더 이상 단순한 괴물 영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는 무엇 위에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다시 꺼내 드는 행위입니다.



에일리언: 인간의 문학적 상상력이 만들어 낸 괴물


에일리언은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존재이지만, 상상력의 차원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정합적인 괴물입니다. 기거(H.R. Giger)의 그림이 스크린에 옮겨질 때 끔찍한 환상이 체현된 다크 판타지는 쉽게 잊히지 않는 것이었고, 실제로 잊혀지지 않고 몇 번이고 재소환되는 중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상상력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그 ‘기능’과 ‘존재’에 대한 것입니다. 완벽한 포식 구조, 목적에 최적화된 신체, 소통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더 분명해지는 위협. 그런데 이는 자연에서 따온 형상이 아니라, 차라리 인간이 스스로를 바라보며 빚어낸 문학적 산물에 가깝지 않나요?


이 점에서 에일리언은 프랑켄슈타인의 괴물과 닮아 있습니다. 그들은 말이 없거나, 말이 닿지 않으며, 창조자의 책임을 질문하지 않습니다. 다만 존재함으로써 묻습니다.

“당신들은 왜 이런 것을 만들었는가?”


저는 에일리언이 인간의 악몽이자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쟁, 확장, 제거라는 논리로 문명을 유지해 온 인간이, 그 논리를 극단까지 밀어붙였을 때 어떤 형상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상상력의 결과물인 거죠.



사회적 상상력으로서의 에일리언: 문명을 비추는 어두운 거울


그러나 에일리언은 단지 개인의 무의식이나 공포의 형상에 머물지 않습니다. 이 시리즈는 일관되게 사회적 상상력, 즉 문명 전체를 비추는 거울로 기능해 왔습니다.


초기 작품들에서 에일리언은 외부의 침입자였습니다. 인간은 피해자였고, 생존자였죠. 그러나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이 구도가 무너집니다. 기업은 에일리언을 이용하려 하고, 과학은 그것을 재현하려 하며, 기술은 결국 인간을 대체하려 듭니다. 괴물은 더 이상 ‘밖’에 있지 않습니다. 괴물은 우리가 만든 체계 안에서 자라납니다.


<프로메테우스>와 <에일리언: 커버넌트>에 이르러서는 질문이 더욱 노골적으로 바뀝니다.

“우리를 만든 존재는 우리를 어떻게 보았는가?”

그리고 이어서,

“우리가 만든 존재는 우리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이때 에일리언은 사회적 은유가 됩니다. 통제되지 않는 기술, 책임 없는 창조, 목적만 있고 윤리는 없는 체계. 그것은 괴물이라기보다, 문명이 스스로를 밀어붙인 끝에 마주한 자화상입니다.



로물루스적 문명: 형제 살해 위에 세워진 세계


이 흐름 속에서 <에일리언: 로물루스>라는 제목은 가슴 한구석을 푹 찌릅니다. 인간과 에일리언은 더 이상 전혀 다른 종이 아닙니다. 동일한 논리, 동일한 충동, 동일한 구조에서 태어난 형제적 존재에 가깝습니다. 한쪽은 문명을 세웠고, 다른 한쪽은 문명을 시험합니다. 그러나 둘 다 생존을 위해 [서로를, 혹은 상대가 누구든지 상대를] 제거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로물루스의 문명은 성공했습니다. 로마는 위대해졌고, 그 신화는 지금까지 전해집니다. 그러나 그 성공이 질문을 삭제한 것은 아닙니다.

— 우리는 늘 로물루스의 선택만을 반복해야 할까요?



다른 상상은 가능한가


에일리언 시리즈를 사랑하면서도 불안해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 세계관은 지나치게 설득력이 있습니다. 너무 현실적이고, 너무 인간적입니다. 그래서 묻게 됩니다.


— 정말로 다른 길은 없는가?


이 질문은 영화 속에서는 명확한 답을 얻지 못합니다. 에일리언은 끝까지 말하지 않고, 세계는 끝까지 안전해지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바로 그 침묵 속에서, 상상은 이제 관객의 몫으로 넘어옵니다.


만약 문명이 형제 살해로 시작되었다면, 형제를 죽이지 않는 문명은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

만약 창조가 폭력으로 귀결되었다면, 책임을 끝까지 감당하는 창조는 가능할까?


이것은 영화가 대신 대답해 줄 수 없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문학과 영화의 역할은 언제나 여기까지였습니다. 답을 주기보다, 질문을 남기는 것. 불편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질문을 우리 손에 쥐여 주는 것.



열린 결말로서의 에일리언


그래서 저는 에일리언 시리즈를, 특히 <에일리언: 로물루스>를 하나의 열린 결말로 읽고 싶습니다. 이것은 절망의 선언이 아니라, 상상의 요구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로물루스의 후예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상상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질문할 수 있다는 사실만큼은 아직 남아 있지요.


에일리언은 우리에게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묻습니다.

“너희는 어떤 문명을 만들 것인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영화 속에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우리의 언어와 선택, 그리고 서로를 대하는 방식 속에 조금씩 만들어지지 않을까요? 그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저는 이 시리즈를 여전히 사랑하고, 여전히 두려워하며, 동시에 작은 희망을 품게 됩니다.


로물루스의 문명 말고, 다른 이름의 문명은 정말 불가능한 것일까요?

에일리언은 오늘도 그 질문을 남긴 채, 저기 창 밖이나 천장 위 어둠 속에서 조용히 우리를 응시하는 것 같습니다.






*남은 이야기: 창조에 대하여

이야기 흐름 상 바깥으로 뺀 이야기가 있습니다. 버리려다가 디저트처럼 먹어도 좋을 것 같아 끝머리에 한 토막 남깁니다. 그런데 스포일러 범벅이어서 시리즈를 성찰적 텍스트로 해독하는 것보다 ‘재미’로 먼저 접하기 위해서는 읽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에일리언의 시작에서(1, 2편에서) 에일리언은 인류와 다른 종이고, 외계(외부)의 낯선 종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시리즈의 3편과 4편에서 인간과 에일리언 간의 연결이 이루어집니다. 단순히 대적 상대가 아니라 종간 교배가 이루어지고, 4편에서의 에일리언의 모습은 인간을 더 닮았습니다. 이 존재 ‘뉴 본’(new born)은 퀸 에일리언을 어미로 인정하지 않아 죽여 버리고 인간 여성을 따르는 모습까지 보여줍니다. 그러나 죽은 퀸 에일리언으로부터 에일리언을 되살려낸 사람들은 창조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혐오와 공포를 맛보아야 합니다. <프로메테우스>에서는 에일리언과 인간 공통의 창조자인 엔지니어라는 외계지성체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외계지성체를 찾는 여정에서 인간은 인조인간을 만들어서 동행하였습니다. 창조자를 신이라고 한다면 엔지니어는 인간에게 신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을 찾아나선 인간이 신을 마주했을 때, 그 신은 인간을 긍정하지 않습니다. 사랑하지 않고 반기지 않으며 질문에 답하지 않고, 실패작으로 간주합니다. 에일리언이 실패작인 인간을 없애기 위해 만든 것은 아닐까 하는 암시마저 영화에 흐릅니다. 고전적 신화와 반대로 우리를 만든 신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않습니다.’

<에일리언: 커버넌트>에서는 신으로서 엔지니어는 제거되었고, 인간이 만든 창조물 데이비드가 등장하여서는 창조의 욕구를 드러냅니다. 그는 불완전한 에일리언을 진화시켜 완성형을 만들어냈지요. 엔지니어가 인간을, 인간이 안드로이드를 만들었는데, 안드로이드가 에일리언을 만들었다? 보다 불완전한 존재가 보다 완전한 존재를 만들었다는 전도된 창조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연속의 정점에서 이루어진 에일리언 창조는 ‘아름다움’ 대신 완전한 ‘살상 효율’을 이룩한 것입니다.

에일리언 이야기는 시리즈를 거듭하면서 초기의 기대와 설정을 배신해가지만 도리어 자기 설정을 더 완성해가는 기이한 여정을 걸었습니다. 그러면서 화면에 펼쳐지는 활극은 더 이상 표면의 액션이 아니라 내적이고 윤리적인 물음으로 진화합니다. 이 시리즈의 시청각적 끔찍함에도 불구하고 읽어내기를 바라는 이유입니다.


창조는, 의미를 부여할까요? 아니면 피조물 스스로가 창조의 의미, 창조 여부를 판단하길 유보하더라도, 탄생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것일까요? 의미가 있어야 할까요? — 아마도. 없으면 빈 공간이 남는 게 아니라 아무거나 무엇이든 외부의 것이 들이닥쳐 그 진공을 채워 버릴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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