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의 것으로서 예술: 예술의 존재 그리고 쓸모에 대하여
저는 예술을 언제나 ‘외부의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외부란, 단순히 나의 바깥이나 사회의 주변부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가 속한 구조, 내가 이미 익숙해진 규칙, 내가 당연하다고 여겨 온 사고의 틀 바깥에서 다가오는 무엇입니다. 저는 평소 “구원은 외부에서 온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내부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한 뒤에도 막힌다면, 그때는 내부를 더 쥐어짜는 대신 “외부를 끌어들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무책임하게 포기하란 게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먼저 정석을 밟으십시오. 규칙을 이해하고, 조건을 충실히 따르고, 요구되는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이 막힐 때가 있지요. 바로 그 때에는 외부가 요청됩니다. 다만 그것은 규칙을 무시하는 ‘위반’이 아닙니다. 그런 쉬운 얘길 하는 게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외부란, 기존의 규칙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 내고, 새로운 조건을 설정하는 힘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변칙은 탈선이 아니라 재구성입니다. 규칙을 없애는 게 아니라 완성하는 셈입니다. 비유하자면 비로소 하나의 스포츠가 태어나는 것이지요.
예술은 바로 그 지점에서 작동합니다. 예술은 구조 안에서 조금 더 잘하는 기술이 아닙니다. 예술은 구조 전체를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보게 합니다. 그대가 속한 세계가 어떤 전제를 바탕으로 굴러가고 있는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무엇을 배제해 왔는지, 어떤 질문은 애초에 허용되지 않았는지를 드러냅니다. 예술은 내부의 언어로는 설명되지 않는 균열을 외부의 언어로 들여다보게 해 줍니다.
그래서 예술은 종종 무용(無用)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당장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고, 즉각적인 효율을 만들어 내지 않으며, 눈에 보이는 성과를 보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생산이 아니라 소비요, 나아가 낭비라고 공격당합니다. 그러나 저는 바로 그 점이 예술의 쓰임새라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예술은 해답을 주기보다 시점을 바꾸어 줍니다. 목표를 달성하는 법을 알려 주기보다, 우리가 왜 그 목표를 목표로 삼았는지를 다시 묻습니다. 그것은 기능의 부재가 아니라 기능의 층위가 다른 겁니다.
그대가 어떤 선택 앞에서 막혀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내부의 논리는 이미 충분히 검토되었습니다. 더 이상 계산할 것도, 비교할 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때 예술은 “다른 답”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대신 “다른 질문”을 가져옵니다. 이 문제가 정말 이 문제인가, 이 기준이 정말 유일한 기준인가, 이 전체 판 자체를 다시 설정할 수는 없는가 하고 질문합니다. 예술은 이처럼 판을 바꾸는 외부로 작동합니다. 단순히 기능이 그럴 뿐 아니라 예술이 본래 설정된 세계가 아니고, 우리가 만들어낸, 세계 내부에 존재하는 세계의 외부입니다. 존재 자체가 그렇다 이 말입니다.
예술이 제공하는 것은 위로가 아니라 거리입니다. 감정의 분출이 아니라 관조의 가능성입니다. 그 거리를 통해 누구든 자신이 속한 구조를 다시 평가할 수 있고, 자신의 위치를 재정립할 수 있습니다. 예술이 가진 구조적 힘은 이와 같습니다. 예술은 그대가 더 잘 적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엇에 적응하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만듭니다.
그래서 저는 예술이 언제나 외부에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도 안에 완전히 포섭된 예술, 효율과 목적에 종속된 예술은 더 이상 외부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부 장식물에 가깝습니다. 예술이 외부로 남아 있을 때에만, 우리는 내부를 상대화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상대화의 순간에, 새로운 규칙과 새로운 조건이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예술은 당신을 대신해 살아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를 다른 각도에서 보게 해 줍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느낄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바로 그 충분하지 않음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유일한 출발점입니다. 그래서 예술을 외부의 것이라 부르는겁니다. 그리고, 그 외부성 때문에, 예술은 결코 무용하지 않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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