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이에게 | 시와 현실

입전수수(入廛垂手)

by 이제월


입전수수(入廛垂手).

불교의 깨달음의 단계를 그려낸 심우도(尋牛圖) [또는 십우도(十牛圖)]의 열 단계 중 마지막 단계 이름입니다. 바로 앞 아홉 번째 그림은 ‘반본환원(返本還源)’으로 본래 자리로 돌아가 열반의 경지를 체득한 상태를 가리키는데, 10단계 ‘입전수수’는 그 깨달음을 가지고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와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단계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차라투스트라가 깨달음을 얻으러 산 위로 올라갔으나 깨달음을 얻고는 산 아래로 즉, 사람들 사이로 내려와 깨달음을 펴는 것도 일맥상통(一脈相通)하지요.


시를 쓰려면, 하나의 시어(詩語)를 견디려면 시끄러운 소음에서 벗어나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리적인 걸 가리키는 게 아니라 마음이 그렇다는 겁니다. 시장통의 소란 속에 있을지언정 그 정신은 쳇바퀴 돌리듯 반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 반복에서 차이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하지만 그가 정말 시심(詩心)을 지녔다면 어찌 그처럼 벗어나는 데서 그치겠습니까? 그가 시심을 지니고도 벗어나 있기만 하다면 아직 그가 시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시는 찾는 이에게도 모습을 드러내지만 아무 준비도 어떤 마음도 갖추지 못한 이에게도 불현듯 찾아오기도 합니다. 다만 그들은 놀라 엉덩방아를 찧을지언정 자신이 본 것이 무언지 영영 알지 못할 겁니다.

만일 시심을 지닌 자가 시와 마주친다면 상황은 다릅니다. 이제 그는 자신이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고자 할 것입니다. 그는 돌아가 자기 시어를 전달해야 합니다. 시에 담긴 빛을 비추려 할 것입니다. 그러고도 자신이 ‘만난’ 것이지 만들어낸 것이 아님을 알기에 저잣거리에 들어가(入廛) 가만히 두 손을 늘어뜨릴 것입니다(垂手).

거기 그냥 있고, 사람들이 해가 나면 해를 맞으러 무얼 하지 않아도 그 영향을 받듯이. 심지어 지붕 아래 숨는대도 지붕 아래 공기가, 집 주위 공기가 통째로 데워져 그 영향을 받듯이 그렇게 복을 베풉니다.


그대는 선한 일을 하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대는 그저 선하면 그만입니다. 이것이 아름다움이 일하는 방식, 시가 우리 곁에 머물러 복을 주는 방식입니다. 입전수수(入廛垂手). 사람들 사이에서 복이 됩니다.




작가의 이전글예람이에게 | 달빛독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