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이라는 골짜기를 지나서
내게 진실로 필요한 것은
내가 알아야 할 바를 명확히 아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할 것을 정확히 아는 것이지만,
그러나 지식이 모든 행위에 선행하게 마련인
그런 방식으로는 아니다.
그것은 내 운명을 이해하는, 하느님이 정말로
나에게 하기를 원하는 바를 아는 문제이다.
나에게 진리인 진리를 찾는 것,
내가 그것을 위해 기꺼이 살고 또 죽을 수 있는
그런 이념을 찾는 것이다.
— 쇠얀 키에르케고어Soren Kierkegaard, 『기록과 일지』 中
‘외톨이’(개인)란, 종교적인 견지에서 본다면
이 시대가 … 전 인류가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범주다.
나의 과제는 비천한 하인으로서 되도록 많은 사람을
‘외톨이’라는 골짜기를 통과할 수 있도록
초대하고 선동하는 일이다.
아무도 외톨이가 되지 않고서는
이 골짜기를 통과할 수 없다.
— 쇠얀 키에르케고어Soren Kierkegaard, 『관점』 中
— 매튜 D. 커크패트릭 지음, 『쇠얀 키에르케고어. 불안과 확신 사이에서』(정진우 옮김, 비아, 2016년)에서 재인용
아마도
초대와 선동의 시기는, 끝났습니다.
지난 주말 한 일간지는 「10명 중 7명이 “정신건강 문제 경험” … “전문가 상담・치료받았다” 26%뿐」이라는 표제의 기사를 게재했습니다. (『한국일보』 2026년 3월 7일자 12면).
한 면을 전부 할애한 이 기사는 지금 우리 사회에 ‘정상은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만일 정상이 ‘문제 없음’을 뜻한다면 말이죠.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거의 모두가 이 질병에 노출됐지만 그것은 정상(定常)이 아니고 비상(非常) 사태이며, 일상(日常)을 빼앗긴 이상(異常) 사태였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정상/비정상을 논할 수 없고, 결국 비상한 시대, 이상한 상황 속에서 커다란 스펙트럼(spectrum)의 어딘가에 점점이 놓인 것뿐입니다. 물론 한 발 물러설 때마다 점은 드러나지 않고 굵은 선과 면이 눈에 비칠 것입니다.
자폐, 아스퍼거 증후군 등으로 불리던 스펙트럼 장애, 더 나아가 신경다양성과 정상성 이해는 하나의 거울상.아니, 동일자의 데칼코마니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개인과 집단의 상호작용과 상호 적응의 사건이라는 게 더 온전한 이해일 것입니다.
데카르트가 인간 이성(理性, ration, reason)을 ‘신적 조명을 받은 지성’이라는 탯줄로부터 끊어, 기계 장치의 내부 회로처럼 인간 안에 내재한 감각(sense, 理性)으로 정의하고, 르네상스 이래의 인문주의(人文主義, humanism)이 ‘개인’(個人, individual)을 당연한 것으로 추구하며, 근대를 현대로 밀어붙인 전 지구적 시민혁명 그리고 세계 전쟁을 거치며 개인을 추구하고, 개인을 완성하는 건 절대왕정의 왕권처럼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숭앙받았지만, 놀랍게도 이럴수록 개인은 더욱더 자신이 속한 크고 작은 집단들과 단절을 경험하고, 고립되어 세상에 대해 왜소하고 자기 자신을 대해서는 공허하여 허약한 전대미문의 취약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는 자연 속에서 중간 정도 위치의 포식자로서 경험하는 취약성과는 다른 것으로서 상호 의존하는 ‘인간’으로부터 이 약함을 부여받고, 부양되며, 공격받고 배제당하는 데 이르릅니다.
개인을 당연시하자 소통의 욕구, 동료성, 더 나아가 공공성을 포함하는 사회성 결핍이 대두되는 아이러니가 펼쳐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개인에 대한 깃발을 가장 뚜렷하게 치켜든 쇠렌 키에르케고어는 일찍이 개인을, 외톨이를 목적이 아니라 ‘과정’으로,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골짜기로 정의하였습니다. 우리는 골짜기 넘어 세계에 진입하기 위해 이 ‘개인이 되는’ 과정을 겪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개인이 되어가는, 전 인류가 그러니까 마지막 한 사람까지 개인이 되어가는 지난한 여정의 끝에 다다랐다는 징후가 지금 우리의 혼란과 이상 상태일 수 있다고. 어느 하나가 정상으로 인식되다가 이상 사례가 반복될 때, 마침내 기존의 정상성을 파기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구됩니다. 토마스 쿤(Thomas Kuhn)은 그의 저서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패러다임 시프트(Paradigm Shift)라는 개념을 소개하는데, 이는 한 시대의 지배적인 과학적 인식 체계인 '패러다임'이 변칙 사례 누적으로 위기를 겪고,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교체되는 혁명적 변화를 의미합니다. 이는 점진적 발전이 아닌 불연속적인 단절이며, 뉴턴 역학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으로의 전환이 대표적인 예로 제시되었습니다. 물론 쿤은 ‘특정 과학 공동체가 공유하는 신념, 가치, 기술, 연구 방법의 총체’로서 패러다임을 정의했지만, 우리는 상상력을 발휘해 이 구조와 작동기제를 과학을 만들고 변형하는 인간정신과 그 인간정신들이 모여 구성하는 사회에도 적용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유별난 예외가 아니라 쿤의 패러다임 전환, 패러다임 시프트라는 개념은 실제로 많은 영역에 전용(轉用)되고 있습니다.
“열에 일곱은 정신건강 문제를 경험한다.” 이는 세계가 멸망한다는 지표가 아니라 현재의 정상성이 붕괴한다는 지표일 뿐입니다. 이 정신건강 문제가 시대적 특징이 있는데, 오늘날 우리 시대의 정신건강 문제는 대부분 타자와 연결되는 것을 통해 치유되는 바, 너무 열심히 ‘개인이 되어서’ 겪는 질병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불량품인가? 실패자인가? 아닙니다. 이 세계가 개인을 만들고, 개인을 늘리면서도 정작 변하지 못해 벌어지는 부조화입니다. 이 파열음은 도리어 우리가 이제 비로소 살아있는 준유기체로 정의할 수 있는 공동체를 구상할 수 있게 되었다고 알리는 신호음일 수 있습니다.
지금은 낡은 것을 버리고 새것은 새것에 담아야 하는 때입니다.
종교의 시대, 신의 시대가 지나갔다고 종교나 신이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냉전이 끝났어도 신냉전으로 이어지는 불씨가 온존한 것처럼, 혹은 미움과 오해가 쌓였어도 최초의 신뢰와 의문이 남아 관계를 회복하는 것처럼, 질병으로 95% 훼손된 간이 다 절개한 뒤 남은 5%에서 100%까지 복원되는 것처럼. 이는 ‘기적적’이지만 기적이 아니고 ‘자연’의 일입니다. 물론 마땅한 조치나 조건을 충족해야 합니다만.
이미 우리는 ‘개인’이 부서지는 것, 개인성을 침해받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옳습니다. 그리고 좋습니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어떤 개인이 될 건가요. 그리고 이러한 개인들은 어떤 세상을 만들 건가요. 만일 그것도 옳고, 좋다면, 우리는 “함께 아름다운 세상을 만든다” 할 수 있겠습니다.
무얼 원하나요?
그걸 사람들에게 말하세요.
내 안의 그림이 명확하게 전달될 때까지 쓰고, 말하고,
상대의 그림을 알 때까지, 듣고, 읽으세요.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이런 ‘이야기-하기’가 필요한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어떤 결과를 불러오든
그건 우리가 하는 일이고,
우리는, 만약 우리 다음의 누군가가 있다면
우리 시대를 변화의 시대, 중요한 전환의 때로 기억할 것입니다.
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