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이에게 | 나무야

편협하지 않기 위해

by 이제월



편협하지 않기 위해 두 가지를 당부하고 싶습니다.

첫째, 부분과 전체를 분변할 것

둘째, 검증가능성보다 반증가능성을 사용할 것


부분의 각 부분까지 세세하게 완벽하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침묵하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애초에 이게 가능하려면 언어가 사물(事物, 事는 일이요, 현상이며, 物은 형체를 가진 몬을 가리킵니다. 즉, 현실하는 것 중 한 사람의 안에서 발생하는 상상의 이미지를 뺀 전부를 가리키며, 경우에 따라서는 그 상상도 현상으로 간주하고 취급할 수 있습니다)에 일일이 대응해야 한다는 것인데, 엄격히 말하자면 입자들의 결합 방식과 그것들이 빛과 상호작용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전부를 ‘단어들’로 뒤덮을 수 있어야 한다는 건데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침묵하면서 알고 있다, 나는 다 진술했으나 언어가 그걸 담을 수 없어 말할 수는 없다. 아무튼, 내가 이겼다, 내가 짱이다 하고 우길 수야 있겠죠. 아무도 설득될 수 없겠지만.

또한 부분의 완벽함을 언어를 빼고 행위, 실행에만 한정한다고 합시다. 이 경우에도 문제는 심각합니다. 완벽성, 완전성의 최소한은 아무튼 무언가의 완결성인데, 완결성을 구성하는 각 부분은 한 점에 모이지 않습니다. 그건 도리어 시간선(timeline) 위에 펼쳐집니다. 그러니까 만약 어떤 것이 정말로 타당하고 심지어 완벽하다 해도 그것은 이 물리 우주 안에서 자연법칙에 의해 제한적으로 현현(顯現)하고, 순차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으며 거기서 어느 부분을 편의적으로 도려내서는 오직 불완전함만 볼 수 있으며, 심지어 복수의 불연속한 표본을 추출해서 나란히 둔다면 그것들의 사이는 서로 어긋나 그 부정합성을 불완전과 오류의 근거로 삼을 수 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전체를 보고, 전체가 맞으면 필요한 만큼, 이게 중요합니다, 필요한 만큼만, 필요한 수준까지만 전체적으로 세부들을 점검하여, 전체와 맞는지 여부에 따라, 그리고 같은 수준(水準, level)을 맞추어 같은 층위(層位, layer)에서 그것들이 상호 정합하는지 맞춰 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를테면 한쪽은 여덟 길의 지층을 파고, 한 쪽은 세 길의 지층을 판 뒤 양쪽에서 나오는 유물이 혹은 화석이 다르니까 이건 조작이며, 양쪽 다 믿을 수 없다 하고 결론을 내려선 곤란하다는 겁니다. 나폴레옹 시대의 프랑스군과 21세기 독일 군대를 비교하면서 아니, 도대체 왜 독일이 프랑스한테 진 거야? 하고 물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칼 포퍼(Karl Raimund Popper, 1902-1994)가 과학과 유사과학을 분별하고자 도입한 반증주의(falsificationism)가 호출됩니다. 이는 어떤 가설이 과학적이다? 그렇다면 그 가설이 경험적 데이터에 의해 반증 가능하다, 라는 겁니다. 반증가능하다는 것은 참과 거짓에 대해 답해준다기보다 어느 사고가 과학적인지를 밝히는 데 사용됩니다. 오늘날 어떤 것이 과학적인가 여부를 어찌 판단하느냐가 우리의 행동과 사고에,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할 때 유용한 기준일 겁니다.

또한 비과학적이라는 것이 반드시 무의미함을 뜻하지도 않습니다. 이 부분들을 찬찬히 살펴봄으로써 어떤 일이 지적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 단순히 결단과 선택의 문제인지 다시 말해, 결정하기 전에 다툴 문제인지 결정 후 성실성과 현명함으로 정당화되거나 실패로 판명될 문제인지를 가릴 수 있습니다.

물론 칼 포퍼의 반증주의는 두 확률 변수의 조건부 확률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방정식인 베이즈 정리를 비롯한 여러 유용한 반론으로 제한적으로만 사용되고 과학사 전반에 사용할 수 없음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우선 우리의 일상에서는 이 정도 태도만으로도 자신의 편협함에서 일정하게 거리를 둘 수 있습니다.


반증주의에 대해서는 검색해 보기 바랍니다. 검색을 통해 찬반 양론과 각양각색의 설명을 들으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으며 조금 부지런을 피운다면 포퍼의 역작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읽으며 전체주의의 광풍이 몰아치던 세계에서 이런 고민과 제안을 한 까닭도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편협함을 피하는 문제는 지속적인 반성적 성찰을 요구합니다. 쉽지 않습니다. 알고도 행하지는 못하며 자신이 편협하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 자체가 잘 안 되기 십상(十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구되는 이유는 간단하고 명백합니다. 뭔가를 듣고 바뀔 수 없다면, 어떤 확장과 어떤 적응이 가능하겠어요? 그리고 변하지 않는 존재가 다른 존재의 변화를 바란다는 건 얼마나 폭력적이고 파괴적일까요?

우리는 배우는 사람입니다. 변한다는 말이고, 그 변화가 좋은 쪽으로 가기 위해 기꺼이 모든 도움과 가능성을 향해 자신을 개방하겠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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