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이에게 | 물길

“모든 진리는 관점적이다 (perspectival)” 그럼에도 불구하고

by 이제월



니체 이후, 우리는 더 이상 순진하게 믿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세계를 하나의 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는 믿음, 선과 악이 명확히 나뉜다는 확신, 우리의 판단이 보편적 진리에 닿아 있다는 안도. 이 모든 것은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남은 것은 관점입니다. 서로 다른 역사, 기억, 언어, 상처, 욕망 속에서 형성된 수많은 시선들. 우리는 이제 알고 있습니다. 모든 진리가 관점적이라는 것을.


그렇다면 질문은 달라집니다.

“무엇이 진리인가?”가 아니라,

“서로 다른 진리들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


이 질문이야말로 오늘날 윤리와 정치가 만나는 지점입니다.


전쟁은 이 질문을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드러냅니다. 전쟁의 당사자들은 각자 자신이 옳다고 믿기 마련입니다. 그들의 언어 속에서 전쟁은 방어이거나 정의의 실현이며, 때로는 역사적 사명의 수행이지요. 그 반대편에서는 그것이 침략이거나 폭력이며, 제거되어야 할 악입니다. 같은 사건이 전혀 다른 의미로 번역됩니다. 이때 우리는 쉽게 상대를 비이성적이라 판단하거나, 혹은 더 나아가 비인간적인 존재로 규정하곤 합니다.


그러나 관점적 진리라는 명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한 발 더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상대의 판단이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 속에서 형성된 결과라는 점을 인정해야지 않나요? 이것은 상대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이해 가능한 존재로 복원하는 일이랍니다. 이해 가능성의 회복은 곧 폭력의 정당화를 제한하는 첫 번째 조건이 됩니다.


문제는 여기서 멈출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관점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냉소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각자 자기 입장이 있을 뿐”이라는 태도는 갈등을 중단시키지 못하니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붙잡아야 할까요.


바로 이 지점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모든 진리가 관점적이라면, 우리는 보편적 진리를 포기해야 하는가. 아니면 다른 방식의 보편성을 찾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우리는 하나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거든요. 그것은 완성된 진리가 아니라, 형성되는 진리를 중심에 두는 것입니다.


형성되는 진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단일한 원리에서 도출된 결과가 아니라, 서로 다른 관점들이 충돌하고 조정되는 과정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랍니다. 강제나 폭력이 아니라, 설득과 응답이 중심이 되는 과정. 이것이 정치가 윤리를 완전히 배반하지 않으면서도 현실 속에서 작동할 수 있는 방식이예요.


그러나 이 과정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답니다.


첫째, 상대를 완전히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는 태도입니다.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는 순간, 대화는 불가능해지고 남는 것은 힘뿐입니다. 물론 모든 폭력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상대를 인간으로 인정하면서도 그 행위를 비판하는 이중의 태도를 유지해야 하는 거죠. 이것은 어렵지만, 평화를 가능하게 하는 최소한의 윤리적 기반입니다.


둘째, 공동선에 대한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는 종종 중립을 가장한 채 가치 판단을 유보하려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회도 완전히 중립적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길 것인가를 끊임없이 결정합니다. 생명인가, 안전인가, 자유인가, 존엄인가. 이 선택들은 언제나 정치적이며 동시에 윤리적이지요. 공동선에 대한 질문을 회피하는 순간, 우리는 시장이나 권력에 판단을 넘겨주게 되어요.


셋째, 자신의 관점 역시 제한되어 있음을 인정하는 성찰입니다.

관점적 진리를 말하는 것은 상대만을 향한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먼저 적용되어야 합니다. 내가 옳다고 믿는 판단도 특정한 조건 속에서 형성된 것임을 인정할 때, 우리는 비로소 타인의 말을 들을 수 있답니다. 이 성찰은 자기부정이 아니라, 더 넓은 이해로 나아가기 위한 조건이예요.


이 세 가지는 단순한 도덕적 권고가 아니라, 전쟁 이후의 질서를 구성하는 실제적 원리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갈등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깊은 상처와 불신이 남을 겁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단순한 휴전이 아니라, 서로를 다시 이해 가능한 존재로 복원하는 작업입니다. 이것은 제도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아요. 기억을 다루는 방식,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 교육과 문화 속에서 형성되는 태도가 함께 작동해야 하죠.


개인의 행복추구 역시 이 맥락 속에서 다시 생각될 필요가 있습니다. 개인의 자유는 공동체와 무관하게 존재하지 않는답니다. 그러나 공동체 역시 개인의 삶을 희생시키는 방식으로 유지될 수 없어요. 이 둘의 균형은 고정된 공식으로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조정과 협상의 결과로만 존재한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균형의 상태가 아니라, 균형을 만들어내는 방식입니다.


국가 간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번영은 경쟁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아요. 협력은 단순한 이익 계산을 넘어,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존재로 인정하는 데서 시작되지요. 이 인정은 약한 감정이 아니라, 가장 현실적인 정치적 자산입니다. 신뢰가 없는 곳에서는 어떤 협정도 오래 지속되지 않는답니다.


결국 우리는 다시 처음의 명제로 돌아왔습니다.


모든 진리는 관점적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하나의 진리를 강요할 수 없고, 대신 함께 살아갈 방식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때 중심에 놓여야 할 것은 완성된 답이 아니라, 서로 다른 관점들이 만나는 장이지요. 그 장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묻고, 수정하고, 다시 시도해야 합니다.


평화는 단순한 상태가 아니예요. 그것은 하나의 기술이며, 동시에 하나의 태도랍니다.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 자신의 확신을 성찰하는 용기, 공동선을 포기하지 않는 집요함. 이 세 가지가 결합될 때, 관점적 진리의 세계 속에서도 우리는 함께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은 절망을 부정하는 선언이 아니라,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의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완전한 진리를 가질 수 없지만, 더 나은 세계를 만들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세계는 하나의 원리에서 나오지 않는답니다. 서로 다른 관점들이 부딪히고 조정되는 과정 속에서, 아주 느리게, 그러나 분명하게 형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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