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가 아니다
때가 아닌 일을 벌일 때가 있습니다. 그게 너무 어이없으면 “지금 때가 어느 땐데…” 하고 말하기도 하지요. 때가 아니란 건 무슨 말일까요? 정해진 시간과 다르다? 하지만 현실의 많은 일에 정해진 때는 없습니다. 하지만 알맞거나 알맞지 않은 때라는 판단은 가능하죠. 알맞음을 결정하는 건 ‘관계’와 ‘상호작용’입니다. 그때가 언제인지, 그때가 이때인지 판별하는 것을 넘어 결정하는 것이, 계속 창조 생성 변형하는 것이 바로 ‘관계’요 ‘상호작용’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거의 모든 것 — 어쩌면 전부가 — 내가 아니라, 타자가 아니라, 나와 타자의 공동 영향이라는 것입니다.
이 합력(合力)을 계산하는 건 여러 개의 줄로 물건을 끌 때처럼 수학적 답이 나오는 건 아닙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거나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처럼, 한쪽에서의 판단, 결정, 행동이 나머지를 다 바꾸기도 합니다. 가장 큰 경우는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 같은 속담에 담겨 있는 것이지요.
반대로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거나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 같은 말도 있지요.
오늘날 국제정세는 역사의 교훈을 통해 강자라고 약자를 윽박지르거나 강제로 제 뜻을 관철하는 걸 (없애기야 하겠습니까마는) 자제하고, 적어도 명분을 쥐고서야 움직이는 쪽으로 발전해 온 ‘성취’와 ‘성과’를 답답한 짐이요 구속복 취급하며 벗어던진 모양새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반복해서 ‘때’를 읽지 못하고 행동하는 ‘때’가 틀리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결국 상대가 있는 모든 일은 나와 상대가 얼마나 합치하는지, 일치는 아니어도 무언가 겹쳐서 연결되고, 그 연결이 함께 결과를 내는 게 가능할 만큼 서로를 움직이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지 못할 때 양자 간 관계와 거기서 가능한 일은 싸우거나 싸우기 직전의 상태를 지속하는 것뿐이며, 후자는 결국 전자로 가는 단계가 억제되는 것에 불과해 결국 다시금 ‘싸움’으로 귀결될 것입니다. 이렇게 명분과 때를 맞추지 못한 싸움은 그 성패와 득실이 주관적으로 가려질 뿐이어서 만일 그게 일개인이라면야 혼자서 소위 정신승리라도 하겠지만 둘 이상이 모인 집단이, 심지어 국가처럼 지향과 성분을 특정할 수 없는 ‘다양성’ 자체인 집단이 벌이는 일일 때에는 처참한 상처로 끝이 나기 마련입니다.
양차 대전을 거치면서 인류는 많은 걸 학습했다고 여겼는데 역시 복습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잊고, 자기 편리를 추구하느라도 잊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잊을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더 ‘기억’할 때이고, 더 ‘직시’할 때이고, 더 ‘고뇌’할 때이고, 다음 합의를 위해 ‘대화’할 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난 역사를 이야기하기에는 모든 기획을 무너뜨리는 현재의 어리석고 성급한 위기들이 터져나옵니다. 그래도 저는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다음을 만드는 건 결국 희망을 좇는 쪽이기 때문입니다.
처음 말한 게 로맹 롤랑(Romain Rolland)이라고 합니다만, 저는 다음의 표현을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의 『옥중수고』(Prison Notebooks)로 만났습니다.
때를 만듭시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단단하게.
休
이 문구는 로맹 롤랑이 1920년 3월 19일, 프랑스 일간지 《라미니테(L'Humanité)》에 기고한 서평에서 처음 등장했습니다. 당시 그는 동료 작가인 레이몽 르페브르(Raymond Lefebvre)의 소설 『아브라함의 희생(Le Sacrifice d'Abraham)』을 평하며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불어 원문:
"C'est ce que j'aime surtout en Raymond Lefebvre, c'est cette alliance intime — qui, pour moi, fait le vrai homme — du pessimisme de l'intelligence qui perce toute illusion, et de l'optimisme de la volonté."
한국어 번역:
"내가 레이몽 르페브르에게서 무엇보다 사랑하는 것은, 모든 환상을 꿰뚫어 보는 지성의 비관주의와 의지의 낙관주의 사이의 긴밀한 결합입니다. 나에게 있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을 만드는 요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