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이에게 | 대지

죽지 마라 —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복음 15장 13절 참조)

by 이제월




누가 자기 친구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것, 그보다 더 큰 사랑은 아무도 지니지 못합니다.

— 요한복음 15장 13절(200주년신약성서)



사랑은 좋은 것입니까?

그렇다고요?

그런데 왜 나보고 죽으라는 거죠?

왜 내 목숨을 내놓으라고 하나요.

사랑은 흡혈귀처럼 내 목숨을 필요로 하는 가요?


그런데 예수는 그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는군요.


잠시 돌아갑시다.

사랑은 좋은 것입니까?

그렇단 말이죠?

그렇다면 한 가지 분명합니다. 사랑은 나를 더해주지 감소시키지 않는다,

나를 증가시킨다.


일단 이걸 두고,


존재가 평등하다고 생각하시나요?

현실이 어떻다 말하는 거 말고

여러분의 자기 기획과, 소망과, 타인에 대한 평가가 어떠하느냔 겁니다.

백인은 우월하고 황인종은 열등하다?

어느 지역은 우등하고 어느 지역은 저열하다?

학은 높고 참새는 낮다?

혹시 이런 식으로 생각하시나요?


아니라면 존재의 평등성을

물리학 입자 단위에서 생각하든 불교의 평등심에서 연원을 찾든

아무튼 존재의를 평등하다고 본다면

하나보다 둘이 낫습니다.

내가 나이기만 한 것보다

내가 너와 하나 되면 내가 커진 것이요, 더 나아진 것입니다.


사실 현실에서도 그렇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 먹는 것도 좋지만

내가 좋아하는 전시 가서 보는 것도 좋지만

우리는 양보하고 선물하면서 순수한 기쁨을 느낍니다.

사실 더 좋습니다.

그럴 수 있는 관계를 그럴 수 없는 관계보다 훨씬 가치 있게 여기고

그게 많고, 크고, 오래기를 바랍니다.

아닌가요?


좋은 친구도 있고 나쁜 친구도 있겠지만.

아무튼 나는 너를 친구로 대한다?

그렇다면 나와 너가 따로인 것보다 함께인 게 좋고

하나면 더 좋지요.


두 개의 동시 충족.

사랑은 좋은 것이다, 그러므로 크게 한다, 와

존재는 평등하다, 그렇다면 나와 너는 합칠 수 있고, 그게 더 좋다, 가

만나면


둘 중 하나가 기각되면 무조건 사그라들고

오직 둘 다가 참이라고 할 때에만

예수의 저 말이

그리스도의 말이 되고 구원의 말인 것이며,

우리에게 유익한 말이 되고, 스승의 말이 됩니다.


벗을 위해 제 목숨을 바치라는 건

내 경계를 깨고 나를 갱신시키는 것.

더 작은 자아가 더 큰 자아를 섬기는 방식으로

삶의 방향을 바꾸라는 요구입니다.


복음서에서 하느님보다 제 가족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는 등 이야기가 여럿입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을 더 사랑해야 한대요.

그런데 예수의 그 말들은 ‘아람어’로 쓰여 있습니다.

당대 그 지역 사람들이 평소 그냥 쓰는 말이 아람어입니다.

신약성서가 희랍어인 건 당시 지중해 세계의 공용어로

많은 독자에게 널리 읽히려고 희랍어로 쓴 것뿐

예수는 아마도 단 한 번도 희랍어로 말한 적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아람어는 희랍어보다는 좀 더 고대어여서

‘비교급’이 없습니다(물론 최상급도).

히브리어도 그러해서

구약성경에서 ‘최고신’을 묘사하기 위해 쓰는 단어가 ‘복수형’입니다.

엘로이의 복수인 엘로힘을 쓰는 거죠.


비교급의 문제로 오면

표현의 한계를 어떻게 우회하느냐면

너 이거보다 저게 더 좋아?, 하고 물을 때, 그 언어에 그 단어, 어휘가 없으니까

이렇게 묻습니다.

너 이거 싫고, 저거 좋아?

사랑도 그렇습니다.

자, 선택해. 저 사람 밉고 나 사랑하지?

저 사람보다 날 더 사랑하느냐 물으려면 이 수밖에 없습니다.


첫머리에 소개한 오늘의 문장은

비교급을 쓴 건 아니지만

비교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언어란 건 사고를 지배하거나 사고를 반영하는 것이어서

저 말을 들을 때 아람어 사용자인 당대 현지의 사람들은 아주 간단하게

친구 목숨을 내 목숨보다 중하게 여기라는 거구나, 하고 듣지

친구는 살리고 나는 죽으란 거구나, 하고 들을 개연성은 아주 낮습니다.


뭐, 격하게 공감하다 보면 친구 살리고 나보고 죽으래 하고 알아듣는대도 하등 문제 될 건 없겠습니다만, 저 말의 본질은 야, 너 죽어. 이건 아니란 겁니다.

‘나’라는 것보다 ‘친구’라는

내가 더 커진, 내가 더 확장된 것이 중요하다.

이 둘을 헷갈리지 마라.

나도 하나의 나이고, 친구도 하나의 나이기만 해서는

아, 가망 없다, 이 말인 겁니다.


작은 걸 버리고 큰 걸 택하렴, 하는 겁니다.

내 다리가 너무 중해서 중독돼서 썩어들어가고 여전히 독이 퍼지는 다리를 절단하지 않는다? 좀 이상한 선택 아닙니까?

다리가 안 중요하단 게 아니라

다리의 생명보다는 내 온몸의 생명이 더 큰 것이지 않습니까?


우리의 짧은 생명보다

내가 품은 뜻, 우리가 이어가고 풍성하게 키울 뜻이 더 오랜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여 죽기까지 할 수 있을 때,

그 사랑은 이미 내 한계를 훌쩍 뛰어넘어선 것 아닌가요?


이로써 예수는 메시아가 됩니다.

믿는이에게나 믿지 않는 이에게나

희망의 근거를 선사합니다.

실패해도 된다, 옳다면.

이게 끝이 아니다.



저 작은 자아, ‘나’라고 지칭한 경계를 깨는 것은

곧 더 큰 자아, ‘우리’ — 친구까지 포함하는

그게 누구든 내가 친구로 여겨 받아들인/바친 이까지 포함하는 경계를 새로 획득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경계가 사라져 활짝 열려야 할 터이고요.

다만, 이 일은 ‘시간 속에서’ 벌어집니다.

제가 누누이 말해온 것처럼, 우리는 시간의 존재입니다.

그래서 둘 사이에는 ‘시차’가 벌어집니다.

마치 청소는 깨끗하게 하고 정돈하는 활동이지만

그래서 청소가 필연하게 그 결과로 이어지지만

놀랍게도/사실 당연하게도

청소 과정에서는, 그리고 (예컨대 걸래의 입장처럼) 일부에 국한해서는 더 어지럽고 더 더럽습니다.

사실 과정 대부분에 그렇겠죠.

시차가 난다는 건 이런 겁니다.


완전하지만, 불완전하게 경험되고

마쳐서야 아는 거죠.


벗을 위해 죽는 건

나를 죽이는 게 아니고

나를 살리는 겁니다.


저 믿음의 세계에서는 유일하게 사는 길입니다.


그래서 이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

인내가 패배가 아니라 승리로 이어지는 길을 연 것이

예수요, 그리스도요, 수난-죽음-부활로 이어지는 파스카 사건입니다.


오늘밤

예수의 돌무덤을 가로막은 바위가 깨지고

우리는 더는 그의 시신을 볼 수 없을 겁니다.


나는 그대도 그러하기를 바랍니다.

그대 안의 죽음은 이제 사라졌습니다.


다시는 죽지 맙시다.

완전히 죽어서

완전히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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