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이에게 | 칼을 줄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거절하기

by 이제월

“I’m gonna make him an offer he can’t refuse.”

결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지.


영화 <대부>(The Godfather, 1972)에서 돈 콜레오네(비토 콜레오네, 말론 브란도 분)가 낮은 목소리로 뱉은

이 말은 이 영화뿐 아니라 영화사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대사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은 사실 정당한 제안이 아니라 무서운 협박에 다름 아닙니다. 저는 영화 <대

부> 속 현실의 실사화가 현대 한국사회가 아닌가 생각하곤 합니다. 교육에 대해서 말이죠. 저는 거래적 사고가 거의 유일한 표준처럼 여겨지는 것 같아 오랜 시간 꾸준히 이 문제를 생각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때 그때 대응하고, 파편적으로 사고할 뿐, 생각을 하나로 꿰는 데는 게을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보고 듣고 느끼고, 겪고 생각하고, 말했던 것, 마음먹거나 경계한 것 들을 어설프게라도 한 번 꿰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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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우리에게 늘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의 형태로 다가옵니다.

지금 이 선택을 하지 않으면 뒤처질 수 있습니다.

지금 이 투자를 하지 않으면 기회를 잃을 수 있습니다.

지금 이 길을 따르지 않으면 되돌릴 수 없는 손해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제안은 겉으로는 합리적이고, 심지어 친절해 보이기도 합니다.

정보를 제공하고, 선택지를 제시하고, 성공 사례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는 아주 단순한 메시지가 깔려 있습니다.

“이 제안을 거절할 자유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선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학생도, 학부모도, 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동시에 어떤 방향으로 끌려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교육의 풍경입니다.


교육을 둘러싼 수많은 선택들은 점점 더 거래의 언어로 설명됩니다.

무엇이 더 효율적인가, 무엇이 더 경쟁력 있는가, 무엇이 더 확실한 결과를 보장하는가.

이 질문들은 틀리지 않습니다.

교육에는 실제로 비용이 들고, 선택이 필요하며, 때로는 경쟁이 질을 높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질문들이 교육을 설명하는 전부가 되는 순간,

우리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놓치기 시작합니다.


교육은 거래 관계가 아닙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교육에는 분명 거래적 요소가 존재합니다.

등록금이 있고, 사교육이 있으며, 프로그램과 서비스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육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일 뿐입니다.


교육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 구조는 거래가 아니라 규범적 관계입니다.


배움은 돈을 지불한다고 자동으로 발생하지 않습니다.

신뢰가 있어야 질문할 수 있고, 참여가 있어야 이해가 생기며,

시간과 반복과 관계 속에서 비로소 축적됩니다.


학생은 서비스를 소비하는 사람이 아니라

배움의 과정에 자신을 참여시키는 존재입니다.

교사는 지식을 제공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참여를 이끌고 책임지는 사람입니다.

학부모는 결과를 구매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과정이 지속될 수 있도록 함께 책임지는 사람입니다.


이 관계가 유지될 때 교육은 살아 움직입니다.

이 관계가 무너질 때 교육은 점점 껍데기가 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교육을 거래처럼 이해하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교육은 실제로 개인에게 이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더 좋은 학교, 더 나은 직업, 더 안정된 삶의 가능성은

교육을 투자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육을 선택하고 비교하고 계산합니다.

그 과정 자체는 자연스럽고, 때로는 필요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이익의 언어가 교육을 완전히 덮어버리는 순간,

교육은 더 이상 사람을 형성하는 과정이 아니라

결과를 획득하는 수단으로 바뀝니다.


배움은 삶의 일부가 아니라 경쟁의 도구가 되고,

학교는 공동체가 아니라 통과해야 할 관문이 됩니다.


이때 교육은 조용히 변질됩니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이 변화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더 잘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뒤처지지 않기 위해 교육을 선택합니다.


모두가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이지만

서로의 상대적 위치는 크게 바뀌지 않습니다.


이것은 선택의 자유가 만든 효율적인 시장이라기보다

불안을 공유하며 유지되는 경쟁 구조에 가깝습니다.


그 안에서 학생과 학부모가 소비자가 되는 것은

비난받을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이해 가능한 선택입니다.


그러나 이해 가능하다는 것이

그 선택이 최선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번 더 물어야 합니다.


이 방식이 정말 나에게 이로운가.


나는 더 많이 선택하고 있지만 더 확신하고 있는가.

나는 더 많이 투자하고 있지만 더 깊이 배우고 있는가.

나는 더 열심히 경쟁하고 있지만 더 안정되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쉽게 답하기 어렵다면,

우리는 이미 어떤 ‘거절할 수 없는 제안’ 속에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제 필요한 것은 단순한 비판이 아니라

관점의 전환입니다.


교육을 거래가 아니라 관계로 이해하기 시작하는 일입니다.


이 전환은 거창한 선언으로 시작되지 않습니다.

작은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배우고 있는가가 아니라

왜 이것을 배우고 있는가를 묻는 것.


이 선택이 남보다 앞서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내가 어떤 사람이 되기 위한 것인지를 구분해 보는 것.


아이를 관리하는 대신

아이의 삶을 함께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것.


학교를 평가하는 대상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 가는 공간으로 바라보는 것.


이 작은 변화들이 쌓일 때

교육은 다시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학생은 더 이상 관리되는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배움을 만들어 가는 사람이 되고,

학부모는 불안을 소비하는 사람이 아니라

성장을 함께 지켜보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학교는 서비스 제공자가 아니라

신뢰를 기반으로 한 공동체가 됩니다.


이것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그리고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를 약속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있습니다.

이 길은 적어도 우리를 덜 불안하게 하고,

덜 소모시키며,

더 사람답게 만듭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너무 오랫동안 받아들여 왔습니다.


이제는 조심스럽게 거절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제안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에게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육은 거래로만 다루기에는

너무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교육의 소비자가 아니라

함께 만들어 가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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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일정에 예고되고 입학과 상담 중에도 안내했지만

“여행 안 가면 안 돼요?” “왜요? 내 돈 내고 가는 건데, 안 가고 싶으면 안 가도 되는 거잖아요.” 같은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 우리가 어느새 ‘만족’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 순간, 저는 분명하게 느낍니다.

이 관계가 ‘교육’이 아니라 ‘서비스’로 바뀌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도 함께 떠오릅니다.

그 말의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사람은

그 말을 듣는 제가 아니라

그 말을 하는 그 학생 자신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일을,

불완전함을 핑계로 더 미루어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여전히 답이 되지는 않을 테지만 무엇을 말하고 제안할지,

거절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스스로 수락하고 싶어지는

그런 ‘공정한’ 제안을 건넬 수는 없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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