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 물거품 같이 읽기-여든여섯 번째날

우리들은 곧잘

by 이제월


모래 물거품 같이 읽기-여든여섯 번째날

우리들은 곧잘




출판된 본문⟫ n.86

우리들은 곧잘 우리 아이들에게

자장가를 불러줍니다.

그러나

그 자장가 소리는

오히려

우리들을 잠재웁니다.



원문⟫

We often sing lullabies to our children that we ourselves may sleep.



새로 한 번역⟫

우리는 종종 우리 아이들에게 자장가를 불러 주다

우리 자신이 잠듭니다



읽기글-1⟫

그대가 평화롭지 않을 때에도 평화를 전하십시오.

평화는 사물이 아니라 사건

능력이 아니라 태도와 그 결행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함으로써

사랑할 줄을 배웁니다.


시작할 거라면

즉시.




읽기글-2⟫

제가 무척 사랑하는 이야기들 가운데 애니메이션들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메리다와 마법의 숲>(원제: Brave)이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같은. 후자의 경우에는 감독이 십년이 넘게 산통을 겪으며 연재를 마친 단행본 일곱 권 분량의 만화책도 출간되어 있습니다. 둘은 한 작품의 두 판본이 아니라 세계관을 공유하는 별개의 작품이라고 보는 편이 좋습니다. 그럼에도 인물과 세계를 공유함으로써 같은 신화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다만 늦게 출발해 먼저 도착해 버린 이야기인 극장 애니메이션은 무르익지 않은 이야기를 따서 내놓느라 관객과 공유하는 고민의 깊이가 현저히 차이 납니다.


메리다와 나우시카는 얼핏 만들어낸 이들이 서로 다른 배경에서 자라왔고 그래서 차이가 날 뿐 비슷하지 않은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거나 오해입니다. 아마도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데에는 몇 가지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첫째, 여성 더구나 어린 소녀를 주인공 삼는 이야기가 매우 드문 탓에 ‘어, 여자아이가 주인공이네’ 하면서 다 비슷비슷하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둘째, 비교적 어린 주인공이 등장하면 우린 그것을 다 ‘성장담’이나 ‘소년/소녀 이야기’고 묶는 편의에 치우친 사고 습관도 가진 것 같습니다.

셋째, 둘의 모험이 주위의 고정관념과 부딪치고, 또 자신과 주위를 변화시키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둘은 매우 다른데, 메리다 이야기는 관심의 초점이 ‘나’를 어쩔까에 달려 있고,

나우시카 이야기는 관심이 ‘세계’를 어쩔까에 달려 있습니다. 그럼에도 둘이 엮는 것은 세계와 관계 맺는 건 나요, 나와 관계 맺는 건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관계를 풀어 갈 때, 우리가 쓰는 방식이 ‘태도’, 에토스(ethos)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두 작품 다 어떤 태도와 태도가 일으키는 변화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똑같이 용맹하고 주체적이며 주변의 협력을 끌어내는 두 여성의 이야기, 두 인간의 이야기는 같지 않습니다. 두 태도는 차이가 납니다.


먼저 메리다의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메리다에게 세계는 본래 정상입니다. 메리다 자신도 정상입니다. 그저 내버려 두면 됩니다. 메리다가 세계와 관계 맺는 것도 아름답고 상쾌합니다. 그렇지만 문제가 발생하자 메리다의 기존 태도는 불협화음을 내고, 메리다가 마침내 태도를 바꾸어서, 당당히 맞선다는 자기 상태에 대한 태도는 유지되지만, 이 용기(Bravery)는 세계와 맺는 태도는 바꾸어 냅니다.

메리다는 완성형이 아니라 좋은 씨앗을 간직한 사람이었고, 그걸 발아할 기회를 누렸습니다. 그래서 메리다는 밝고, 빛나며, 자기 확신을 기꺼이 나눕니다.


다음으로 나우시카의 이야기는 메리다와 달리 이상을 겪는 세계를 다룹니다. 나우시카 자신도 여러 문제를 겪고 있으며, 그것들은 메리다처럼 ‘위기’나 ‘위험’이 아니라 실제의 결손, 손상입니다. 내버려 둘 수가 없습니다. 도피하지 않는다면 해결해야 합니다. 나우시카가 세계와 관계 맺는 것은 아름답고 숭고합니다, 그리고 아립니다. 나우시카는 용감하고 신중하며 고뇌합니다. 그의 실천과 선택들은 세계의 변화 또는 세계가 드러내는 얼굴에 따라 다르게 이어지지만, 근본적으로 나우시카가 자기에 대하여 갖는 자기 태도와 세계에 대하여 갖는 세계 태도는 동일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나우시카는 이미 ‘된 사람’이고, 다만 세계가 작게 주어졌다가 점점 커지고 변화무쌍해짐으로써 그 동일한 태도가 연주해내는 여러 음을 현현해 줄 뿐입니다. 나우시카가 아니라 세계가, 자기가 간직한 씨앗을 발아할 기회를 누립니다. 나우시카는 어둡고, 빛나며, 번민하는 가운데 제 신념을 지킵니다. 이런 면모는 특히 13년의 연재로 맺음된 일곱 권의 만화에서 더 잘 드러납니다.


메리다는 내내 우리를 고원, 그러나 상쾌한 고원 위를 달리게 해 주지만, 나우시카는 산 위든 하늘이든 바람이 있지만, 바람이 거의 없어 숨쉴 수 없는 곳에까지, 그렇다고 멈춰 서면 다시 숨통이 트이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있어도 힘써야 하는 자리까지 우리를 끌고 갑니다.


메리다 이야기가 교훈(물고기)을 준다면, 나우시카 이야기는 성찰(물고기 잡는 법)을 줍니다. 윤리적 고민. 피할 수 없는 자기 결단.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나 <별의 목소리>, <너의 목소리는.> 등의 세카이계가 주는 것과 전혀 다른 실제의 세계 관계, 세계 태도. 내 행동이 객체로서 세계가 아니라 나와 대등한 뭇 주체들의 연결망으로서 세계에 주는 영향을 보여 주는 무게가 작품에 있습니다.


아주 거칠게 ‘태도’란 ‘세계와의 관계를 결정짓는 방식’이라고 불러 보겠습니다. 그리고는 동그라미를 그려봅시다. 이 동그라미는 단일폐곡선입니다. 전부를 가리키기 위한 기호입니다.

원의 내부에 메리다가 있습니다. 그는 세계와 아름답게 맞섭니다. 그는 용기와 우정, 둘 다를 알고 키웁니다. 물론 그건 메리다의 정직함이 뒷받침해 줍니다. 메리다라는 원은 세계 안에서 꾸준히 성장해갈 것이고, 아마도 더욱 둥글고 튼튼해질 겁니다.

그러나 나우시카의 경우는 다릅니다. 나우시카는 원이 어떻게 일그러지거나 어디로 흐르든 그 원을 감쌉니다. 원의 내부가 아니라 외부가 나우시카입니다. 원은 세계입니다. 원이 아무리 커져도 원 바깥은 무한하게 늘 그러합니다. 나우시카의 태도는 세계가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있느냐에 따라 냉정과 열정, 자비와 엄격 모든 얼굴을 보여 주지만, 사실 나우시카는 언제나 세계를 똑같이 대하고 있었습니다. 천지불인(天地不仁)이 떠오릅니다. 대자대비(大慈大悲)가 떠오릅니다.


동그라미 안이 자기인 사람, 곧 동그라미에 제한되는 사람은 좋은 태도를 가졌어도 세계의 세부에 영향을 미칠 뿐 전체 판을 흔들지는 못합니다. 그는 세계에 적응해 나갑니다. 우리는 그런 생을 목격하면서 생에서 환경이 미치는 영향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동그라미 밖이 자기인 사람, 동그라미에 제약을 받지 않는 사람은 단지 좋은 태도를 가진 것을 넘어서 자기 태도로 세계를 결정하고 있습니다. 동그라미 안에서 세계에 대한 태도를 결정짓는 사람은 세계가 이러이러하므로, 곧 네가 이러이러하니까 내가 이런다, 라고 답합니다. 그러나 동그라미 밖에서 세계인 동그라미에 대한 태도를 결정짓는 사람은 내가 이러하므로 나는 세계를 이렇게 본다, 세계가 이럴 땐 이렇게, 또 저럴 때는 저렇게 한다고 답합니다.



메리다는 아름다운 딸입니다. 세계는 분명 그 아이를 키운 것을 기뻐할 것이고 자랑할 것입니다.

나우시카는 위대한 어머니입니다. 세계는 분명 후손인 줄 알았던 그이가 도리어 조상이라고 깨달을 겁니다. 그이가 저를 키운 것에 경외감을 가질 것이고 감사할 것입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7권에 이런 대화가 등장합니다.


—틀렸어요, 도저히. 모두 나우시카처럼 될 수는 없어요.

—어떻게든 막아야 해. 나우시카가 되지 않아도 같은 길을 걸을 수는 있다.


당신이 길의 어디에 있건, 이제 막 발을 디딘다 하여도

길의 끝이 거기인 건 변하지 않습니다.


걸을까요?

노래하실래요?

Shall we dance w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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