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단락 해명
고향에 대한 두 개의 진술. 고향과 나의 관계에 대한 시간적 진술. 첫째, <오랫동안 잊고 지낸> 고향이라면 그 위치는 과거. 둘째, <오랜동안 바라던> 고향은 그 위치가 미래다. 두 진술은 서로 대립한다. 나는 지금이며, 고향과 대립한 현재성을 집이라 하자.
첨부한 그림 1처럼 설명할 수 있다.
고향 지금
잊고 지낸
=집 바라던 고향
노래부르는 두 개의 고향은 서로 ‘다른’ 고향이다. 둘은 같을 수 없다. 그리고 고향은 본래 이렇게 이중 지위를 갖는다. 두 개의 지위를 갖기 때문에 고향이 고향이 아닌 다른 지나온 것들(과거) 및 고향이 아닌 다른 지나갈 것들(미래)과 차별된다. 그런데 이게 가능한가? 잊고 지내거나 바라는 데 소요되는 ‘오래’라는 시간이 같은 시간이라면, 아니, 무엇이든 오래거나 짧게거나 가를 수 있는 시간 안에서는 이처럼 하나의 사물이 두 개의 좌표를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두 개의 좌표를 갖는다면 그것은 아예 다른 사물이다. 그러나 노래하는 이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둘을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 같은 사물을 지금 이렇게 <고향집에서> 조우하고 있다. 따라서 고향이란 건 지금 또는 지금에 이르도록 경험하였고 또 앞으로 경험할 그 어느 것과도 다르다.
고향은 사실 ‘영원’에 속한다. 고향의 본래 속성이 ‘영원성’이며, 영원이 체험되어 ‘각인’된 것이 고향이다. 아래 그림처럼 영원이 현재로 흘러들어오고(하강/falling or incar-nation), 경과 후 현재 자체를 영원으로 가져간다(상승/Ascendance).
첨부한 그림 2를 참조.
첫 번째 조우 상실 그리고 두 번째 조우
: 기억된다. : 잠깐 만남 : 희망/갈망된다
영원 즉 고향
경과하는 시간
*시간은 늘 현재로 경험된다.
언급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이 더 있지만, 그것은 맨 마지막에 이야기하겠다.
이와 같은 영원과 현재의 조우, 다시 말하여 구체화한 영원 그리고 이상화한 현재가 아무 때나 올 리 없다. 고대 희랍의 언어로 말하면, 이 시간은 카이로스(kairos)다. 그러므로 노래하는 이는 ‘오늘’이 ‘여느 때’와 다르다고 읊조린다.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첫 작품에서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해질 수 있다. 그리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라고 말하였다(참고: ⟨⟨논리-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철학자는 저승의 것에 침묵한다. 그리고 시인은 비언어로 노래한다. 재즈의 스캣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