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읽기(1)-고향집에서(5)

<라> 단락 해명

by 이제월

<라> 단락 해명


사랑방 부엌엔 쇠죽 쑤시는 할아버지

정정하신 할아버지 오래 사세요


그리스도는 일찍이 안식일 규정을 어기며 치유를 베푸는 자신에 대한 반대에 이렇게 응답하였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5장 17절 참조). ‘할아버지’는 노래하는 이의 ‘아버지’이며, 영원성을 지니는 고향을 살아 있게 만든다. 그는 일한다. 그는 정정하다. 아마도 장남이라면(이스라엘이라면) 아버지를 걱정할 것이다. 그에게 할아버지는 높음과 큼, 권능과 엄위의 이름이 아니라 노쇠와 위축, 병고와 소멸해 가는 것의 이름이다. 그러나 막내는 아버지를 더욱 신비적으로 바라본다. 그는 ‘사랑하는 막내아들’로서 ‘사랑받았’던 기억뿐 아니라 그것이 여전히 유효하고, 사랑이 여전히 권능이라는 것을 안다. 그는 형들처럼 아버지를 병자 취급하거나 노인 취급하거나 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처소, 고향집을 뜯어 고칠 낡은 것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들이 너무도 일찍 깨어 나름의 선과 악을 알고 아버지와 아버지 집을 대상으로 바라볼 때 막내아들은 여전히 느릿느릿 아버지-어머니의 사랑 속에 머문다. 막내아들은, 곧 시인은 세상에 덜 깨어 났고, 세상의 질서에 덜 물들었으며, 그가 삶을 체험하는 방식은 — 비록 그도 어디선가 ‘너무’ ‘오랫동안’ 고향과 고향이 방식을 잊고 형들처럼 살았을 테지만, 지금 다시 이 자리에서 — 현재를 직접 느끼는 것이다. 그는 감각하고 민감하게 깨어 있다. 그에게는 ‘정정하신’ 할아버지가 보이며, 부엌일을 하시는, 살림을 하시는, 생명을 키우는 그의 놀라운 모습에 ‘오래 사세요’라고 축원한다. 그는 자신이 언제까지고 ‘사랑하는 막내아들’이라는 것을 안다. 막둥이의 약함은 힘이다.



고추잠자리 따라 뛰노는 내 조카들과


어린 조카들 또한 고향이 아닌 곳에서 즉, 설령 그들이 태어나 자랐을 지라도 거기에 영원이 내려온 그 생생한 현재성이 없는 곳에서 살던 방식을 잊고, 고추잠자리라는 비논리적이고 계획과 예측, 통제가 불가능한 존재를 따라 뛰논다. 그들은 오롯하게 현재에 머문다. 현재를 산다.



아직 뭘 잘 모르는 두살짜리 내 아들의


막둥이의 두살바기 아들은 어린 존재다. 뭘 모르는 어리석은 존재. 그에게는 현재뿐이다. 그는 피할 길 없이 과거에도 미래에도 매이지 않는다. 허깨비들은, 그 어떤 유령도 이 어린아이를 지배할 수 없다. 그는 오롯하게 현재에 있고, 그러므로 영원하다. 이 존재는 스스로 고향과 일치해 있다. 그러나 눈이 제 속을 못 보듯 그에게는 그것이 관찰 대상은 아니다.



어울림이 좋은 날이야


어떤 계획도 없이, 어떤 조정도 없이 그 어울림은 그저 좋다. 무엇을 생산하는 강박도 시비를 가리는 압력도 없다. 고향에서 그들은 고향처럼 편안하게 영원에 맡겨졌다. 인위적 효율을 위해 익숙하고 가까운 것끼리 붙여 놓는 문명의 기계성에 반하여 이들은 서로의 다름에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 아무런 의무가 없으므로 아무런 율법도 시비도 결국 죄도 없다. 죄가 없으므로 편안하다. 이 어울림은 뛰놀음이고 쉼이고 좋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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