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하는 베짱이는
출판된 본문⟫ n.188
노래하는 베짱이는 나무라면서
일하는 개미만을 칭송하는 사람들의 시야는
얼마나 좁은 것입니까?
원문⟫
How narrow is the vision that exalts the busyness of the art above the singing of the grasshopper.
새로 한 번역⟫
여치가 노래하는 것보다
그 기술의 분주함을 찬양하는 시각이 얼마나 좁습니까
*각각 긴 세 개의 읽기글을 전합니다.
읽기글∙1⟫
슬프게도 이 유치하고 편협한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버틀란드 러셀의 자서전을 읽어보면
세상이 최고의 지식계층에게 바라는 것은
행동이 아니라 사상이며, 그것이 훨씬 귀한 자질이라고 합니다.
행동은 평범한 정치가도 할 수 있다면서요.
그래서 그는 우리의 문제들을 숙고하여 그 결과를 글로 담아내며,
차세대의 스승들을 통해 서서히 스며들도록
내버려두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귀한 자질인 것은
그것이 우월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소수의 사람들만이 할 수 있고,
소수의 사람들이면 충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수의 사람들이
다수가 필요한 다른 소중한 일을 할 때,
우리는 그들의 몫을 알아주어야 한다는 이야기쯤으로 받아들이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잊고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부를 노래와
거기에 맞춰 춤출 수 있게 하는 이들이
최상의 계층이라는 것.
그들은 그들의 일로 인해 존엄해졌다는 것.
모든 생명체가 잠과 각성을 되풀이하듯이
살아간다는 건 그렇게 꿈과 현실을 아우르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한쪽만 중요하다는 것은
인간이 양분을 섭취하는 건 낮이고
몸이 자라는 건 밤이라는 한 가지 사실에만 비추어보더라도
아주
좁은 생각임이 분명합니다.
읽기글∙2⟫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세 개의 천부인(天符印)을 기억하십니까?
환인 천제는 천부인을 주어 인간세상을 다스리게 하였다는데,
삼부인은 피리(방울이라고도 하는데 마찬가지지요.)와 거울, 칼이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통치의 세 가지 수단을 나타낸다 하겠습니다.
칼은 무력으로 누르고 이끄는 것이며,
거울은 백성에게 본을 보임으로써, 또는 가르침으로써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 거울에 천부경이 적혀 있었다는 얘기도 있지요?)
분명 거울은 칼(검)보다 높은 차원의 통치술이지만, 둘 다
군주가 백성을 향해 무언갈 함(爲)으로써만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부인(삼부인)에서도 으뜸은 피리(또는 방울)라 하겠습니다.
피리로 다스리다니 어찌된 일일까?
그것은 가르치지 않고 음률로써 백성들이 신명을 내고 바로 살아가게 했다는 것 아닙니까?
더욱이 칼과 거울은 모두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우등한 것이고,
이를 전제로 하는 것인 반면
음률은 서로가 똑같이 어울려 즐길 수 있는 것으로
대동(大同)이요 평등(平等)이요, 이것이야말로 홍익(弘益), 재세이화(在世理化)가 아닌지요?
예부터 악(樂)은 군주의 소양이었습니다.
비록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를 만들어낸 이유는 따로 있을 지라도 그것이
지금처럼 해석되는 건 곤란합니다.
우리는 이 무위(無爲)의 치(治)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지배자가 아니라 지혜로운 친구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희노애락을 나누고 싶습니다.
읽기글∙3⟫
이 조각글의 경우 한글 번역이 오역이라고 생각합니다.
grasshopper는 베짱이가 아니다, 여치(류)다 하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문화적으로는 저들이 말하는 grasshopper가 우리가 말하는 베짱이로 옮김직합니다.
그보다 저는 시인의 통찰을 개미 대 베짱이로 나눈 것에 당황합니다.
어떻게 보면 두 개의 자질을 비교한다는 것은 여전하고 유효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칼릴 지브란의 통찰이 가장 소중한 것, 또는 바야흐로 맞이한 현대(아직 20세기의 연장이라고 생각하니까요)의 사유들이 이전과 구분되는 까닭이란
마침내 이치와 저치로 나누지 않고 한 사람 안에서 그 특질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고
하나의 행위 안에 상이한 극성들이 함께 발현하며
때때로 그것들은 함께 하며 완전해진다는 것
이 일원성의 인식이
동서를 막론하고 퍼졌다는 점입니다.
물론 격랑에서 물방울 하나하나, 물살 한 줄기 한 줄기는 어지러이 방향이 엉키듯이
변화의 시대에 이원성과 일원성, 만남과 흩어짐이라는 상반된 흐름은 함께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흩어지고 갈래 치던 것들이 하나로 모아지는 전환, 이 방향 바꿈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한 마리 여치가 노래합니다.
그의 노래함, 그 존재, 그 총합인 전체가 나눌 수 없이 하나로 경이롭고 찬탄할 만합니다.
그러나 바야흐로 하나로 어우러져 빛을 발하는 그 순간에
사람들은 약초에서 약성 물질을 가려 추출하듯이
또는 감각하고 잴 수 있는 것만 실재한다는 듯이
그 기교의 분주함만을, 화려하고 계측 가능한 것만을
또는 그것을 더욱 높이곤 합니다.
지브란은 부분이 전체보다 크다고 하는 저 놀라운 억지에 한탄하고 있습니다.
시인에게 그것은
자구나 발음 등 어떤 요소만을 대단하다 하고
정작 시는 전혀 느끼지 않고
귀 기울이지 않는 행태처럼 보일 것입니다.
노래함과 노래하는 기예의 분주함.
베짱이와 개미라는 두 태도, 상이한 개체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비유는
마침내 이루어낸 아름다운 것과
아름다운 것을 이루어내는 데 동원된 한 수단, 과정 가운데
우리는 그것을 ‘아름답다’ 이르게 한 자체 말고
기계적으로 인과를 설정해
무엇을 조작하면 저게 나오겠지? 하며
기예를 탐하고 채찍질하는 것이 아닌가 묻고 있습니다.
당신은 삶을 사랑하십니까?
아니면
삶의 분주함만을 숭배하십니까?
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