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 물거품 같이 읽기-백아흔다섯 번째날

한 여인은

by 이제월



출판된 본문⟫ n.193

한 여인은 항의했습니다.

“물론 이 전쟁은 정당한 전쟁이었겠지요.

하지만 나의 아들은

이 전쟁의 포화 속에 쓰러졌습니다.”




원문⟫

A woman protested saying, “Of course it was a righteous war. My son fell in it.”





새로 한 번역⟫

한 여인이 항의하며 말하였습니다

“물론 그건 정당한 전쟁이었습니다

내 아들은 거기서 쓰러졌습니다”





읽기글⟫

접속사는,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합니다.

그것은 자주 그 말을 듣는 사람에게서 생각을 빼앗아가 버립니다.

마치 훅 부는 바람처럼.


지브란은 여인으로 하여금 단지 물론 그것이 정당한 전쟁이다, 서술한 뒤

내 아들이 거기서 쓰러졌다/죽었다, 고 말하게 합니다.

아무 다른 설명도 안내도 소회도 없습니다.


but이 없는데 “하지만”이라고 달아 버리면

뜻이 바뀝니다.

이렇습니다.


지브란이 그려낸 바는

두 개의 정당한 진술, 혹은 두 개의 긍정을 내 놓고

이 모순을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의 목소리, 항의를 전달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 둘을 생각이라는 저울에 올려 봅니다.

어떤 이는 이쪽이, 어떤 이는 저쪽이 더 무겁다고 할 것이고

어떤 이는 한쪽이 저울 접시에 오를 자격이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어떤 이의 마음에서 저울의 양팔은 수평을 유지할는지도 모릅니다, 멈추지 못하고 떨거나.

그러다가 아무튼 저울은 멈춥니다.

사고의 기반, 현실의 체험이 바뀌면 저울도 흔들리겠지만

그러다가 다시 멈추고 그 기울기를 보여 줄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양식이요, 양심이 됩니다.

저울은 양심이고, 저울이 보여 준 기울기는 양식으로 뇌리에 새겨집니다.


그러나 ‘하지만’이라고 말하면

여인의 항의는 처음부터 우리에게 일방향으로 메시지를 전합니다.

전쟁이 정당했다는 말은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내 아들을 죽여 놓고서 전쟁이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묻는 말이 됩니다.

이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제시된 결론에 대해 “예”나 “아니요”로만 답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생각하는 대신 서둘러 답을 합니다.

우리 자신이 비겁하거나 어리석다는 인상을 주거나 받지 않으려고. 또는 동정심에 어서 동조해 주거나 자리를 피하기 위해.


그러나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이라는 집단의 생존 행위와

개인의 생사를 고찰하고, 둘 사이를 잇는 가느다란, 그런데 여러 개인 선을 헤아려 보는 대신

‘이 말을 들었다’는 사건과

‘이 항의에 답했다’는 자기 기억만 남긴 채

서둘러 모든 걸 종결하게 됩니다.

사태는 해결되었고 우리는 잊습니다.


그러나 시인의 방식은 우리가 기억하게 하고, 생각하게 하고, 문제 앞에 서게 합니다.

우리는 ‘아들을 죽인 전쟁’에 대해 생각하는 대신

‘전쟁’을 그 ‘올바름’을 생각하고

‘아들’과 ‘아들의 죽음'을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 젊은이는 기꺼이 참전하고, 기꺼이 전사했을지도 모릅니다.

그와 그의 벗들에게 영광을 남겼는지도 모릅니다.

그 전쟁이 어떤 거룩함이 있는지, 어떤 추악함이 있는지

승패가 어떻고, 실제로 얻고 잃은 게 무엇인지

피할 수 없던 것인지 등과 별개로

한 사람의 참전과 죽음에 여러 곡절이 있을 것입니다.


여인의 항의는 아들을 살려 내라는 겁니까, 기억하라는 겁니까, 유족에게 보상하라는 겁니까, 무언가 설명하라는 것입니까?

여인의 항의가 죽음 때문인지, 죽음 뒤 올바른 현양 여부에 관한 것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물론 독립군의 활동은 정당했어요. 나는 내 딸을 잃었지요.


누가 이렇게 말한다면 어떻게 들으실 터입니까?


노동 운동은 꼭 필요하고 올바라요. 내 아들이 그 한가운데서 번제로 바쳐졌지요.


열사의 어머니는 단순히 희생자의 어머니는 아닙니다.

또 죽음을 선택하는 많은 이들이

이편에서 바라볼 때 저편으로 갔기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우리 인식 너머 ‘저편으로 갔다’로 서술되지만

이편에서 살아감의 문답 끝에

이편에서의 살아감을 멈춘 것뿐인지도 모릅니다. 여기까지다, 여기까지가 좋다, 그리고 너희, 남은 자들, 여기서 이어가면 되겠구나.


우리는 생명이라는 가장 큰 씨름 한가운데 있습니다.

태어났다는 건 죽는다는 자명한 사실 한 가지로 다가가면서

달려갈지 달아날지를 결정하는 단순한 선택들을 반복하다가

멈추거나 넘어서는 순간을 드물게 맞습니다.


나는 끝까지 산 자들을 죽은 자들로 여겨 추념하는 우리 모습이 이상합니다.

우리는 어느 한 순간 온전히 살았단 말입니까, 이 반푼이들이

온전한 이들을 향해, 그들이 작은 흠집이 났다고 해서 동정할 까닭이 없습니다.

여한이 있을지 없을지가 궁금할 뿐이지만

그렇다면 살아가면 됩니다.


영화 <연애사진>(Collage of our life, 2003)에서 남자는 여자를 보기를 그치고

여자가 보던 자리에 서서 여자가 본 것들을 봅니다.

그러려면 그 자리에 가서 그 몸짓과 기다림을 재현해야 합니다.

여자는 살아 오지 않지만

남자는 이제 살아납니다.




죽은 이들을 욕보이지 맙시다.

이건 산 자들의 특권이고 의무가 아닐까요?


생명을 준 이가 항의하는 건

전쟁을 왜 했느냐는 때늦은 항의가 아니라

다른 말일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일어납니다.


알겠다, 그럴 만했겠지, 어쩔 수 없었거나.

그런데 너흰 어쩔 건데?

이제 어떡할 거지?

나는 죽은 그 아이 말고

너와 이야기하고 있어.

네 생각을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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