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을 타고 ~ 비가 와도 젖지 않아
[1]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는
새들은 걱정 없이
아름다운 태양 속으로
음표가 되어 나네
노래하는 이는 먼저 나서지 않는다. 그는 조급하지 않으며 자기를 내세우지 못해 안달하지 않는다. 그는 마치 투명한 창처럼 노래를 듣는 이에게 세계를 선사한다. 그는 세계를 보고 관찰한다. 그이의 눈에 처음 잡힌 장면, 또는 처음 그가 노래한 세계의 모습은 ‘새들’이다. 이 새들은 난다. 땅에 구속되지 않는다. 물론 그들은 내려와 잠들지만, 그들은 끝없이 다시 하늘로 ‘날아오른다’, 그런데 어떻게? “바람을 타고”. 그리고 이 새들은 “걱정 없이” 난다. 바람을 탄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우리는 바람을 막는다. 바람에서 내려와 땅에 서고는 땅을 갈고 땅에서 거둔다. 땅에 의지해 산다. 우리가 땅에 의지하는 건 딱히 더는 내려갈 곳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롯하게 중력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새들은 영원토록 벗어날 수도 없지만, 영원토록 벗어나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그 새들은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는” “걱정 없이” 나는 이들이다.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시오.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추수하지도 않을 뿐더러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십니다. 여러분은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습니까?
(마태오의 복음서 제6장 26절)
새들의 실제 살림살이를 노래하는 이는 모른다. 그러나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 마냥 날아오르는 새들은 삶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을 가볍게 한다. 그 새들은 “아름다운” “태양” “속으로” 들어간다. 마냥 들어가서 땅 대신 해에 구속되는 것이 아니다. 노래하는 이는 그들을 보며 “음표가 되어” “나네” 하고 노래한다. 음표는 진동, 곧 존재하지만 입자가 아니다. 20세기 초, 물리학의 최대 화두는 입자성과 파동성 중 어느 것이 사물의 참모습이요, 참된 기초인가였다. 아인슈타인은 빛의 독특성, 곧 입자이자 파동이며 파동이자 입자인 성질을 밝히는 연구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입자성을 가진 새는 파동성을 가진 음표가 되어 ‘난다’. 새는 공간에 귀속되는 대신 시간 속에, 그리고 영원 속에 들어간다. 구분되는 존재에서 융화한 존재가 된다. 이렇게 하면 새는 태양의 일부가 된다. 물론 그것은 영원 속에서 이루어질 일이고, 당장은 잠깐, 태양 빛에 젖어 모습을 감출 뿐이다, 곧 다시 제 모습을 띤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음표가 되었고, 닿을 수 없는 거리를 뛰어넘어 바라보는 이의 가슴에 쩡 하고 울린다. 그 진동, 그 음악이라는 ‘정체’를 드러낸 이상 새는 그냥 새가 아니다.
태양은 왜 아름다운가. 그것은 빛을 뿜고 있다. 새도, 울려퍼지는 노래로서 태양과 하나다. 그가 걱정 없이 날아오를 때.
[2]
향기 나는 연필로 쓴 일기처럼
숨겨 두었던 마음
기댈 수 있는 어깨가 있어
비가 와도 젖지 않아
마음은 꼭 숨겨 두어야 한다. 마음은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실재하고, 그러므로 깨질 수 있기에 소중하다. 소중한 것은 올바르게 다루어져야 한다. 올바르게 다루어진다는 것은 임자를 만나야 한다는 말이다. 모든 마음은 실제로 존재할 뿐 아니라 결코 홀로 있지 않다. 모든 마음은 늘 ‘향한다’. 밖을 향하는 마음, 타자他者에게 개방된 마음만이 진짜다. 어떤 마음도 홀로 선 채 온전할 수 없다. 이 마음을 노래하는 이는 “향기 나는 연필로 쓴 일기”와 같다고 한다. 그런가? 그러한가? 당신의 마음은 폐허인가, 무언가 쓰여져 있는가? 쓰여진 것은 살아 있는가, 산 사람들의 도시처럼 수많은 이야기가 계속 살아나고 있는가, 아니면 죽어 빈 도시, 유령들만 오가는 자리인가? 노래하는 이는 준비하였다. 그 마음은 숨겨 두었지만, 마음 가꾸기를 게을리하거나 멈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채우는 일기요, 사건을 남겨서 언제고 다시 ‘불러들일’, 응답(response) 가능한(possible) 상태, 곧 책임 있게(responsibility) 산 모습이다. 한 번 쓴 일기는 펼칠 때마다 시간을 공간처럼 펼쳐 보인다. 그리고 읽히면서 되쓰인다. 그것은 상기되고, 재해석되어 과거에 머물지 않고 현재에 그 같은 감정 혹은 변형, 발전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마음은 그 일기처럼, 자신이 겪은 모든 것을 간직한다. 마음이 겪은 일, 곧 읽은 것들은 모조리 마음에 쓰여진다. 읽는 것은 쓰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을 꺼내어, 본래진면목本來眞面目을 찾아 읽을 수 있는 이, 바르게 읽는이를 만나 바른 때에 바른 곳에서 펼쳐지도록 숨겨 두는 것이다.
마리아는 그 모든 일을 당신 마음 속에 새기어 곰곰히 생각하였다.
(루가의 복음서 제2장 19절)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새겨 두었다.
(루가의 복음서 제2장 51절)
노래하는 이가 말하는 ‘비’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아니다. 그 비여도 상관 없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것이다. 이 비가 가리키는 것이 물질로 감각하는 비 이상이라는 점은 비가 와도 젖지 않는 까닭을 “기댈 수 있는 어깨가 있어”라고 서술한 데서 확증된다. 우산이나 비옷, 비를 피할 지붕도 아니다. 차나 천막도 아니다. 하늘은 여전히 열려 있다, 열려 있어야 한다. 그러나 어깨를 기댈 수 있자, 비는 오더라도 노래하는 이를 적시지 않는다. 비는 마음을 적시고, 삶을 무겁게 하는 전부다. 예기치 않고, 피할 수도 없는 것으로서의 비. 삶에서 닥치는 모든 우연은 기댈 수 있는 어깨를, 마침내 지닌 노래하는 이에게는 어떤 위해도 가하지 못한다. ‘기댈 수 있는 어깨’는 내 모든 우연을 마주쳐 필연으로 바꾸어 준다. 그러므로 이제 다른 우연은 이 단단한 결속을 깰 수 없고, 이 단단한 연결에 침투하지 못한다. 마치 자물쇠가 열쇠를 만난 것처럼 그들은 풀 때 풀고 잠글 때 잠그지만 다른 무엇이 그들을 풀거나 헤치지도, 닫아 걸지도 못한다.
우연들이 마주쳐 필연을 맺었다. 그러나 그것은 서로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통해 비로소 자신이 온전해진 것이다. 마음은 활짝 개어, 태양 속으로 들어간 새들처럼, 스스로 음표가 되어 날고, 스스로 환히 비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