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일들은 잊어 ~ 받아 준 순간부터
[3]
어제의 일들은 잊어
누구나 조금씩은 틀려
완벽한 사람은 없어
모순투성이이고 외로운 나를 봐
노래하는 이가 ‘어제의 일들은 잊으라’고 할 때, 그것은 ‘어제의 일들을 잊으라’는 것과 다른 말이다. 어제의 일들을 잊으라는 것은 어제의 일들이 좋지 않거든 그냥 그걸 잊으라고 권유하는 것이다. 곧 어제의 일들이 ‘어떠하기’ 때문에 잊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제의 일들은 잊으라’고 할 때에 그것은 어제의 일들은 잊고 다른 일들, 곧 어제가 아닌 다른 때의 일들은 잊지 말라는 말이다. 어제의 일들을 잊어야 하는 이유가 좋거나 나쁘거나 어떠해서가 아니라 ‘어제의 일’이기 때문에 잊으라는 요구. 우리가 기억하는 건 오직 ‘어제’뿐이기에, ‘어제 겪은 일’이거나 ‘어제 한 상상’뿐이기에 “어제의 일들은 잊어”라고 말하는 것은 기억에 매이지 말라는 주문, 내 인생에서 한 번 ‘결정된’ 것들에 속박되지 말라는 주문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틀려”라는 말은 뭔가 틀린 것들만 솎아내는 말이 아니다. 그런 판단은 그 순간의 기준에 의한 것일 뿐이다. 기준이 바뀌면 판단도 바뀐다. 그러므로 누구나 아무리 올바르게 판단했어도 그때그때 새로운 생각에 의해 ‘조금씩은 틀리’고 만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다. 어제의 일들을 잊어야 하는 까닭은 어제의 일들을 오늘 기억하고 판단함으로써 어제와 오늘을 묶어 버리고, 그럼으로써 오늘의 내가 어제의 일로 해서, 나를 판단해 줄 유일한 ‘결정된’ 일들인 ‘어제의 일들’로 말미암아 판단되기 때문이다. 하지 않은 일이 기소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가 판단하는 삶을 살려 하면 우리는 언제나 어제의 일들로 기억되고 판단된다. 그러나 오늘은 이미 어제가 아니다. 오늘은 이미 어제가 아닌데, 오늘의 나만은 어제의 일들로 판단당하는 부조리. 노래하는 이는 이 부조리를 반대한다. 그러나 거칠게 부딪치고 따져 묻는 대신, 가볍게 위로하고 문제를 훌쩍 넘어선다.
“완벽한 사람은 없어”는 우리가 이 순간 여전히 미완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완벽을 기하는 데 얼마가 들었건 완벽한 상태는 티끌만한 변화로도 더는 유지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아무도 완벽할 수 없다. 만약 완벽하다면 죽은 것인데, 죽었다면 이미 완벽하지 않다.
완벽한 사람이 없다고 하는 것이 듣는 이를 주저앉히는 말인가? 노래하는 이는 “모순투성이이고 외로운 나를 봐” 하고 권한다. 그는 듣는 이를 분리시키는 대신 노래하는 이와 함께 하게 한다. 어떻게? 자신을 듣는 이 곁으로 데려다 놓음으로써. 모든 듣는 이, 심지어 아직 듣지 않았고 결코 듣지 않을 수도 있는 이들 모두에 대한 규정(완벽한 사람은 없어. 누구나 조금씩은 틀려)에 이어 그 사례를 바로 자기로 듦으로써, 너와 나는 하나다, 너와 나는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완벽하지 않고, 조금씩은 틀리는 누구나의 모습은, 이제 이러한 외부에서 바라본 묘사에 이어 내면에서 스스로 그리는 묘사로 바꾸어 나타난다. “모순투성이이고 외로운 나”는 내가 바라보는 나, 내가 발견한 나이다.
노래하는 이는 우리를 주저앉히고 자신 또한 주저앉아 패자들의 연대를 만드는 것인가? 아니다. 그이는 단지 약한 자들, 약함을 가진 이들의 연대를 만들 뿐이다. 이들에게 희망은 “어제의 일들은 잊”으라는 주문에 있다. 이 마법과 같은 주문은 지금의 나에게는 아무 일도 없다는 것,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 무엇으로도 규정되지 않는다, 단지 모순투성이라는 현상을 ‘보고’, 외롭다고 ‘느끼고’ 있다는 것만을 내 몫으로 남겨 둔다. 그 나, 노래하는 나는 (노래하는 이는 이제 노래하는 나이다), 이렇게 보고 느끼고 깨어 있는 나는 딱 한 가지 행동을 한다.
“[나를] 봐”.
초대한다.
내 존재에로 너의 존재를 초대하는 것. 이것이 모순투성이이고 외로운 온 세상 모든 ‘내’가 하는 일이다.
[4]
난 다시 태어난 것만 같아
그대를 만나고부터
그대 나의 초라한 마음을
받아 준 순간부터
자칫 현상을 유지하거나 막막한 채로 희망도 절망도 없는 ‘색깔이 없는’ 존재들의 동아리를 이룰 뻔한 때에 노래는 멈추지 않고 다음을 노래한다. [3]과 [4] 사이에는 아무런 구분이 없다. 이는 곧장 이어진다. 앞의 이야기가 종결되고 뒤의 이야기를 짜맞추는 게 아니라 동시에 일어난 일을 노래라는 시간선을 달리는 행위양태에 맞추어 부득이하게 앞뒤로 놓았을 뿐이다. 둘은 함께다. 노래하는 이는 더욱 약한 자리로 가서 한 순간에 하나만을 노래하지만, 듣는 이는 노래하는 이의 노래 선물을 받아듣고 전부 한 점으로 모을 수 있다. 노래를 들으며 저 모르게 그렇게 한다. 하나의 선율旋律을 하나의 점율點律로 바꾼다. 이 선율은 또한 존재를 꿰뚫어 안과 밖을 잇는 것, 너와 나, 부분과 전체를 잇는 선율禪律, 삶의 방법이다.
그런데 점, punctum에 모아들일 선율, 가락은 무엇인가. 가락은 무어라고 노래하고, 듣는 우리 안에서 어떤 한 점으로 맺힐 것인가. “난 다시 태어난 것만 같아”. ‘~건만 같다’는 표현은 자신없음도 불확실함도 아니다. 노래하는 이는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안다. 이어지는 세 줄이 그것을 말한다. 그러나 정확하게 아는 그것은 말로 할 수 없는 것,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이다. 도를 도라고 말하면 이미 불변하는 도가 아니고, 이름을 이르면 이미 변치 않는 그 이름이 아니다. 가리키면 빗나가는, 슐뢰딩거의 고양이 같은 상황. 분명 사실은 하나인데, 관찰이 사건을 변화시키는 것처럼, 알고 있지만 알고 있는 것을 알려 주면 듣는 이는 반드시 잘못 알아듣게 되는 것, 그것은 현묘한 도, 신비神秘다.
대신에 노래하는 이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잘못’(비트겐슈타인)을 저지르는 대신, 신비체험神秘體驗을 이야기한다. 신비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신비체험은 말할 수 있다. 그 체험은 나의 느낌(다시 태어난 것만 같아), 체험이 벌어진 사실(그대를 만나고부터), 체험의 정체에 대한 생각(그대 나의 초라한 마음을 받아 준)으로 기술된다. 그리고 그 사실(만나고-부터)에 대한 내 생각(받아 준 순간-부터)은 일치한다. 나는 확신한다. 불확실해서도 아니고, 자신 없어서도 아니다. 노래하는 나는 전에는 생각할 수 없으리만치 확신한다. 그도 그럴 것이 “비가 와도 젖지 않”는 확실한 삶의 체험 앞에서 어떻게 흔들리고 어떻게 의심한단 말인가.
“난 다시 태어난 것만 같”다. 내가 전에 결코 어떤 인과관계도 떠올릴 수 없게 새롭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제의 일들은 잊”으라고 하는 거다. “그대를 만나고부터” 그렇고, 그것은 “그대”가 “나의 초라한 마음을” “받아 준” 것 때문이다. 바로 그 “순간부터” 나는 다시 태어났다,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