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다시 꿈을 꾸게 되었어~ 받아 준 순간부터
[7]
난 다시 꿈을 꾸게 되었어
그대를 만나고부터
그대 나의 초라한 마음을
받아 준 순간부터
다시 태어난 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노래하는 나는 “다시 꿈을 꾸게 되었어” 하고 노래한다. 우리는 어린시절을 기억한다. 어린시절로 거슬러 내려갈수록, 혹은 올라갈수록 더욱더 많은 꿈을 천변만화하게 바꾸어 꾸었다. 다시 태어난 자는 너무도 당연하게 어린아이와 같이 된다.
예수께서 보시고는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도록 그대로 두시오. 그들을 가로막지 마시오.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이들의 것입니다. 진실히 여러분에게 이르거니와, 어린이처럼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결코 그곳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마르코의 복음서 제10장 14~15절)
다시 태어난 이가 할 일은 단순하다. 어린이가 되어 어린이답게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수용은 어른의 방식으로 할 수 없다. 그리고 어린이가 되는 일은 물론 다시 태어나지 않고는 할 수 없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진실히 진실히 당신에게 이릅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새로 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니고데모가 예수께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새로 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으로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하고 말했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진실히 진실히 당신에게 이릅니다. 누구든지 물과 영으로부터 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육으로부터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부터 난 것은 영입니다. 당신들은 위로부터 새로 나야 한다고 내가 당신에게 말했다고 해서 놀라지 마시오. 바람은 불고 싶은 곳으로 붑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릅니다. 영으로부터 난 이는 모두 이와 같습니다."
(요한의 복음서 제3장 3~8절)
우리는 몸과 마음도 구별하지 못하여 마음조차 만지고 싶어하며 그래서 약의 위력을 과신한다. 노래하는 이로서 리채Lee-tzsche는 앞선 1999년에 발표한 아홉 번째 앨범 <The Asian Prescription>을 통해 ‘다른alternative 약藥’을 이미 제시했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다시 그 처방을 이어 가고 있다.
몸이 태어났다고 마음이 태어난 것은 아니다. 몸이 유한한 경계 속에서 한 번 피고 진다고 해서 마음도 한 번 피고 지는 것은 아니다. 마음은 몸과 달리 경계 자체를 넓힌다. 몸은 그 마음이 설정한 경계 안에 머문다. 세계가 감각의 창을 통해 들어와도 마음이 보지 않는 것은 보이지 않고, 마음이 듣지 않는 것은 결코 듣지 못한다. 우리는 오직 마음의 허락 아래 나아가고 펼쳐진다. 다른 마음이 외부에서 들어오면, 그것은 빙의憑依, possession이며 그 자체가 불의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몸만 남기면 내가 있는 줄로 알고, 다른 생각, 다른 마음(흔히는 인습, 두려움과 굴종, 다시 말해 겁과 비겁 및 그렇기에 받아들이고 젖어든 것들)이 들어와 나를 채우는 걸 용인한다. 그렇게 우리는 나 자신이지 못하고, 누구가 아니라 ‘무엇’으로 식별된다. 우리가 소유당할possessed 때, 우리는 우리가 소유한/소유했다고 간주되는 것에 의해서 구별된다. 소유한 모든 것이 소유했다고 간주되는 것이라는 점은 소유의 주체는 언제나 나 자신이 아니라 내가 소유를 주고받는 집단이라는 점, 그 집단이 인정하는 만큼만 내가 소유한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홀려 있을possessed 때, 우리는 자신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규정된다. 심지어 그 타인들조차 각자 아무도 주체로 기능하지 못한다. 철인 플라톤이 ‘국가’를 대괴물이라고 지목했지만, 진짜 거대한 괴물은 우리들 자신의 비주체성, 홀려 있음, 비아非我, not-self 상태이다.
그러나 노래하는 나는 그대, 대타자大他者를 만났다. 누구는 신을 보았다고 하고, 누군가는 신이 되었다고 하지만 이건 그런 게 아니다. 나는 세계와 나를 분리하던 걸 극복하고 기꺼이 세계의 일부가 된다. 사라지는 게 아니라 온전해진다. 그래서 나의 작은 자아가 자기이고 싶은 욕망, 이게 나야, 라며 ‘어제의 일들’로 나를 부르고, 어제의 일들로부터 다음 나를 규정하고 공상할 때, 그 거짓 나[false ego]가 참나[True Self]로 바뀌어 스스로 부처일 때, 나의 참됨, 참모습[진여眞如, 타타타tathata(산스크리트어. 진여를 깨달은 자, 곧 부처는 타타가타tathaghata, 覺者)]을 깨달아 비로소 꿈꾼다. 그 전에는 마하마야Maha Maya, 거대한 꿈이 펼쳐졌는데, 그것은 내가 스스로 꿈꿀 수 없는 동안 세계가 꾸어 보여 준 꿈이다. 그러나 세계는 또한 나이기에 이 꿈은 아직 꿈꿀 줄 모르는 내 모습이 반영된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거울의 방에 갇혀 있고, 무한히 반복되는 윤회의 사슬로 묶였으며, 모든 것이 고통이다[일체개고一切皆苦], 모든 것이 허상이어 바뀌어 버린다[제행무상諸行無常]. 그러나 우리가 “그대를 만나고부터”, 우리는 더 이상 뚝 떨어진 존재, 버려진 존재가 아니다. 빙의된 나, 가짜 나를 벗어버리고 어린이가 하늘 나라를 맞이하듯 ‘삶의 신비’에 투신할 때 우리는 세계 속에 하나이며, 나와 세계는 분리되지 않는다[제법무아諸法無我]. 여래의 가르침이 생생하던 근본불교 시절에는 이렇게 세 가지를 일컬어 삼법인三法印, tilakkhaṇa이라고 가르칠 뿐 다른 번다한 가지가 없었다. 교리, 가르침은 이게 전부였다. 이것은 문제의 겉과 속, 그리고 해법이다. 우리는 무엇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다. 채워야 하는 게 아니라 나 아닌 것들, 비아를 태워 버리고 쏟아 버리고 끝끝내 비워야 한다.
그렇게 초라한 내가 되어야 한다. 마음 말고 아무것도 없어야 한다. 진심盡心만이 진심眞心인 자리, 진심眞心이라며 꾸며 대는 갖은 것들이 번제燔祭로 일소一掃된 자리, 사실은 “그대 나의 초라한 마음을 받아 준” 것은 초라한 마음이라도 받아 주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초라한 마음”, 다한 마음盡心이기 때문에 받아 준 것을 가리킨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습니다.”
(마르코의 복음서 제10장 25절)
[남이 꾼] 꿈이 그쳤으니, [내가] 꿈을 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