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안개 속에
출판된 본문⟫ n.273
산이 안개 속에 가리웠다고 해서
동산이 될 수는 없습니다.
참나무가 비에 젖었다고 해서
수양버들이 될 수 없듯이.
원문⟫
The mountain veiled in mist is not a hill; an oak tree in the rain is not a weeping willow.
새로 한 번역⟫
산이 안개에 묻혀 가려졌다고 언덕이 아닙니다
참나무가 빗속에 있다고 수양버들은 아닌 것처럼
읽기글∙1⟫
현상으로 실재에 다가서지만 때로 멀어지기도 합니다.
경험으로 판단하지 마십시오.
오직 그대의 정신으로 판단하십시오.
몸은 감각하고 그 경험을 내어 주지만, 판단은 오롯하게 정신의 몫입니다.
책임자가 책임지는 거지, 열심히 일한 이들에게 책임을 미룬다면 그 자신 결정권을 내놓아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정신의 존재입니까, 아니면 동물이나 식물, 심지어 광물과 같게 취급해도 되는, 그것이 전부인 존재입니까?
(다음 세 개의 읽기글은 읽어도 읽지 않아도 좋습니다. 수년 전 써 둔 것인데, 이제 보니 군말입니다. 그래도 그런 게 위안이 되기도 합니다. 읽는 분은 이 또한 가볍게 즐기실 수 있어 빼지 않고 달아 두었습니다.)
읽기글∙2⟫
깨어있다는 건 무작정 긴장해서
곤두서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주 편안한 상태입니다.
깨어있는 것이 힘든 것은 처음 깨어날 때,
깨어남이 익숙치 않은 동안뿐입니다.
마치 앉거나 설 때 구부정한 자세를 바르게 고쳐나갈 때처럼.
마찬가지로 깨어있는다는 건 정향(正向)되었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무턱대고 신경을 모두 열어두었다는 것이 아니라
(가장 넓은 의미로) 신경이 모든 것에 올바르게 반응하는 것을 뜻합니다.
모든 정보를 올곧게 해독할 때, 올바로 수용할 때
그때 그 신경은 깨어있는 것입니다.
흔히 철학에서 지성의 대상을 ‘매개된 직접성’이라고 일컫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올바른 표현입니다.
지성은 오직 신경의 매개(媒介)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는 것들을
자신의 ‘직접적인’ 대상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매개되었으나, 그것들은 지성에 어울리는 오롯한 형태로 완전 새로워져서야만
지성의 대상이 됩니다.
후각의 대상이 냄새이듯 감각신경들이 그 감관(感官)에 대응하는 사물과 사태를
매개없이 마주치는 반면
지성은 자신의 지적재료를 감관의 매개를 통해 수집합니다.
그러나 지성은 감관이 준 자료를 어느것도 그 형태나 그 내용으로 받아안지는 않습니다.
이 부분이 나에게는 신비롭습니다.
아무튼 깨어있다는 건 이 신묘하기까지 한 과정을 겪는 만큼
더욱이 그것이 인간의 정신이나 마음뿐 아니라 영혼까지 관여하는 것이라면
깨어있음은 그 자체가 언제나 ‘올바로 깨어있음’을 의미할 것입니다.
올바로-이 단어는 수식(修飾; 꾸밈)이 아니라 그 자체로 깨어있음-이 말의 일부인 것입니다.
그리고 지브란은 깨어있음이 깨어있어야 할 대상이
젖거나 가로막는 것, 가리는 것이 아니며
젖지도 마르지도 않은 본래의 상태, 가리는 것 너머의 가리운 것임을 적시(摘示)합니다.
보십시오.
깨어있다는 것은 매개된 직접성을 갖습니다.
깨어있다는 것이 대상으로 삼는 것은 ‘혼란 가운데 질서’입니다.
깨어있다는 건 아무나 다 아는 것을 뒤미쳐 아는 것이 아니라
깨어있지 않은 자는 지나치고 마는 ‘가려진 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 그것을 향해, 그것과 더불어!!!
살아있는 것입니다.
읽기글∙3⟫
그리스도교의 성서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빛은 언제나 하느님과 함께 있어 어둠 속에 숨긴 것도 아시고, 깊은 데 숨어 있는 것도 밝히시는 분이시어라”(다니엘서 2장 22절).
또 어느 예언서에선가 “당신은 진정 숨어계신 하느님!”이라고 부르짖습니다.
칸트에게서 하느님 또는 존재 자체는 물자체(物自體)로 환원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칸트는 “물-자체는 알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나는 말하겠습니다.
물-자체는 알 수 없어도 우리는
물-자체에 깨어있을 수 있습니다.
깨어있자면 물자체는 환상이고 하느님은 실재입니다.
우리는 사물의 가장 깊숙한 본성에서 사물들을 새로 만날 것이고,
존재계를 재구성할 것입니다.
읽기글∙4⟫
덴젤 워싱톤이 주연한 “리멤버 타이탄(Remember the Titans)”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에서 워싱톤은 백인세가 강한 고등학교의 풋볼팀에 부임한 감독으로 분했는데,
극중에서 감독은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네가 나를 싫어한다는 것이 내가 나쁜 사람이란 걸 뜻하진 않는다.”
결국 지브란은 중세 철학의 전통 가운데 토미즘 보다는 스코티즘에 가까우며
그렇다고 데카르트와 칸트 사이에서 표류하지도 않습니다.
지브란은 물-자체에 대한 막연한[허구적] 인식 또는 인식의 포기 대신에
‘사실-자체’에 집중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작업은 이성의 정련이 아니라
감성을 포괄하고, 주체성을 검정하는 지적감수성 전반에 대한 정련입니다.
그것의 정화, 중립화, 영점에 맞추는 일은
우리 자신을 저울로 만들 것이고, 적어도 저울을 찾게 만들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깨어있다,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