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나는 유난히
출판된 본문⟫ n.14
예전에 나는 유난히 귀가 밝은 사람을 알고 있었습니다.
불행히도 그는 벙어리였습니다.
그는 전쟁에서 혀를 잃었던 것입니다.
이제 나는 그에게 이 위대한 침묵이 오기 전에
얼마나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가 알 것 같습니다.
그가 죽은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 둘을 다 수용할 만큼
충분히 넓지 못했던 까닭입니다.
*원문을 찾지 못한 8개의 조각 글 중 하나.
읽기글-1⟫
이 책은 그 특성상 언어 이상의 언어.
언외(言外)의 것을 많이 담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오늘, 이 조각글도 그렇습니다.
이것은 시인 자신의 고백인 한편
신비하거나 모호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는 상당히 다층적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지브란이 “우리 둘”이라고 할 때 하나는 저
귀밝은 사람이겠으나
하나는 시인 자신일까요, 정말?
그리고 저 치열한 전투는 무엇이며
위대한 침묵의 한 축이 죽은 것이 다행하다는 건,
세상이 둘을 담기엔 좁다는 건 대체 어떤 뜻일까요?
불행히 저에겐 그런 혜안은 없지만
혼자 상상해 봅니다.
모든 소음도 비웃을 우주의 광대함조차
혀를 잃은 자, 말을 놓은 자의 침묵을 담기엔 좁은 것이라고.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저술 맨 끝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자신이 자신의 책에서 말하지 않은 그 무엇이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여지지 않은 ⏤그래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비춰줄⏤ 그 깨달음 앞에서
우리의 ⏤말이 되고, 그래서 분별의 잣대가 되는⏤ 지혜란 얼마나 누추한 것일까요?
…둘이 있기에 비좁다면 둘이 하나가 되면 어떨까요?
최단 거리를 찾는, 점유 공간을 찾는 우리의 접근을 바꿀 필요가 있겠습니다.
읽기글-2⟫
기존의 지브란 연구에서 이 단락을 따로 상세히 비판해본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연구라기보다 직감을 따라, 저 귀밝은 자, 죽은 자가
지브란이 자주 ‘가장 매력적'이라고 하던 예수가 아닐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모래∙물거품》의 후반부에 실린 글들은 집중적으로
예수를 직접 거명하고 있습니다.
(조각글 279; 312; 313; 314; 315 번 참조.)
한국어판만 아니라 영어판에서도 그렇습니다.
지브란의 생전에 나온 작품으로 작가의 의도와 확인에 의해 출간된 것이기에
후대 편집자의 자의적 해석이 개입한 게 아닙니다.
특히 315번 조각글은 예수의 죽음을 아마도 한 사람의 죽음으로 보겠으나
실은 자신이 함께, 하여 두 사람이 죽은 것이라는 진술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10대에 스스로를 ‘이교도’라고 묘사했으며
《반항하는 정신》을 쓴 뒤 오스만 투르크 정부의 압력에 의해
레바논 교회로부터 파문당하기도 했습니다만
스스로를 크리스트교 신자로 언급하곤 하였습니다.
재미난 것 하나. 흔히 오쇼 라즈니쉬로 알려진 브하그완 슈리 라즈니쉬는
죽기 전, 자신의 원의에 따라 마지막으로, 미루어 왔던 《예언자》 강의를 합니다. 이때,
지브란을 일컬어
“그는 또 하나 예수가 될 수 있었는데, 크리스트교의 신자가 됨으로써 그러지 못했다”고
칭찬 겸 비난하였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말 우리는 끝없이 구별됨으로써만 자신이 되거나 위대해집니까?
예수가 되는 것과 예수를 믿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위대한지 궁금합니다.
이 논란을 접어 둔 채, 저는
지브란이 《예언자》나 여타 자신의 작품들에서 가리킨 ‘더 큰 자아’와
자신의 ‘작은 자아’ 사이의 결합을, 먼저 자기 안에서 꾀하였으며
종종 그 일치를 꿈꾸었지만
그가 속한 시대상 속에서는 부득이한 표현의 제약을 받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렇더라도 그는 우리가 지금 목도하는 바와 같이
억압의 표적이 되어 제물로 화하는 대신
더 큰 은유들과 함께 우리에게 창조적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지브란을 굳이 그리스도교의 테두리 안에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분명 쓸모 있는 이해 도구일 수 있지만, 지브란에게 있어서는
이 책 《모래∙물거품》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나자렛의 예수와 기독교도들의 예수는 결코 일치할 수 없으니까요.
⏤내버려둔다면.
우리의 인습과 딱딱하게 굳어 대물림하는 사고로는 말입니다.
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