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재하는 초월에 관하여
월요일의 브런치 Active Passive.
능동수동태. 이 모순적 이름이 월요일 꼭지의 이름입니다.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성경에 쓰이는 독특한 문장의 형식을 이르는 말로 신적 수동태 또는 신학적 수동태라는 말이 있습니다.
divine passive [voice]
라틴 어로는 passivum divinum
theological passive
이는 하느님을 주어로 쓰는 것을 피하기 위해 동사의 행위자(agent)를 생략한 채 쓰는 수동태를 지칭합니다.
입시마 베르바 예수ipsissima verba Jesu 곧,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들이 신적수동태로 쓰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학자 예례미아스는 예수의 친전을 구분하기 위해 신적수동태에 주목하고 공관복음에서만 100번 이상, 신구약 전체에서는 200여 회에 달하는 신적수동태를 찾아냈다고 합니다. 저는 게을러서 희랍어 성경을 들고서도 이를 일일이 찾아 보지는 않았습니다만.
아울러 예수가 부활하였다고 기록할 때에도 복음사가는 신적수동태를 사용합니다.
"무덤에서 일으켜졌다”는 말에서입니다. 이 문장에서 예수는 주어가 아니라 목적어로 쓰여서 주어가 숨어 있지요.
삶에서 어떤 일들은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명료하게 눈앞에 벌어져도 우리의 경험과 지식은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습니다. 그런 때가 있습니다. 그걸 인연이라고 하든 운명이라고 하든 업이라고 하든 부르기야 저 나름 애쓰는 것이요, 그것을 딱 꼬집어 밝히기는 어려운 일들이 있습니다. 아니,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안 그런 일이 또 없습니다. 바로 그런 것들, 매우 능동적이고 적극적이지만, 현상으로서는 수동적으로 겪는 일들, 살아가는 일들, 살아지는 일들, 그러다가 사라지는 것들.
사람을 만나고, 사람으로 살아가고, 다른 사람을 일으키는 일을 하다 보면, 상황들은 곤란하고 조건들은 불가능을 가리키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충분한 시간, 충분한 자원, 충분한 힘이 있다면 바꿀 수도 있겠지만, 그런 식으로 무제한 주어지는 것들은 없다고 해도 좋습니다. 그런데 분명 할 일을 다하지 못하였고, 내 할바가 끝나지 않은 채로, 어쩌면 여러 잘못과 어긋남이 연속한 뒤에 빠방, 변화가 일어나는 때가 있습니다. 완고한 마음을 닫아 건 빗장이 풀리고, 더욱이 찬바람 속에서 이미 스며든 따뜻한 봄바람을 감지할 때가 있습니다.
어제까지 “아니요”로 일관하던 그의 마음이 바뀌어 어쩌면 그리도 선선히 “예” 하는지! 그를 향해 쌓아둔 걱정과 근심이 미안할 만큼 무언가를 직면하고 일어서는 순간에는, 이 기적을 어디에든 소리쳐 전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드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찌 된 일일까 밝히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고, 뭐라도 좀 뒤져 보기도 하였지만, 함부로 무언가로 환원하기보다는 나는 그냥 그 일을 모른다, 그 일의 목격자도 나요, 예언하고 예고하고 애쓴 것도 나지만, 정말로 그 일이 왜 일어났는지, 사실 그 일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내가 증언할 것은 해명이 아니라 조명. 그저 그러했다는 증언이구나,하는 깨달음.
그래서 희망은, 마땅히 내재하여야 하지만 언제나 초월한 것으로 경험됩니다. 나는 초월을 경험하되 그 최초의 알아차림은 이미 내재하여 발생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거리를 둔 채 알 수 있는 인지가 아니라, 예지조차 아니라 감각의 소관입니다. 다만 그 감각이 발생하는 순간, 나는 내 몸이 변하였다는 것, 적어도 잠자던 감관이, 내 것인 적 없던 감관이 일어나 감각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게 됩니다.
모든 ‘일어남’들에 나 또한 일어납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는데 모든 게 변한다”는 불교를 비롯한 여러 고대 지혜의 시적인 통찰은, 사실은 복잡한 사유의 결과물이 아니라 압도하는 경험을 묘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왜 일어났습니다. 왜 생겨났고, 왜 절망이나 냉담에서 일어나 읽거나 쓰고, 말하거나 듣습니까? 어떻게 당신의 인간으로서의 삶을 계속하고, 더욱 인간적이고자 불능과 불허로 가득 찬 세상을 기꺼이 누리십니까? 어쩌다가 가장 중대한 순간에 그르치지 않고 나아간 것입니까? 아니면, 늘 실패와 패착뿐이었는데도 살아서, 이리 다시 무언가를 찾습니까? 그것은 당신이 한 일이 분명하지만, 정말 당신이 한 일입니까?
일어난 모든 것들을 축복이라 믿으려 애씁니다. 그렇게 사물을 긍정해야만 어떤 것도 감각의 그물을 벗어나지 않고, 인지의 편파적인 판정을 거슬러 모든 것에 모든 것을, 모두에게 모두를, 다시 말하여 기회를, 여지를 두기 때문입니다.
가르친다거나 배운다는 것은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감히 결정된 대로가 아니라 지금 현재가 가치 있다고, 내가 핸들을 쥐고 돌릴 수 있다고,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나는 놓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변화를 희망하지 않는다면 저 모든 일들은 거짓부렁이입니다. 당신이 무언가 한다면, 하는 이상 당신은 희망하는 자입니다. 당신의 세상이 희박한 공기 속을 걷는 것인지 풍성한 숲의 공기를 들이키는 것인지, 물에 용해된 산소를 찾아 심해의 고압을 견디는 것인지는 별개로 하고.
나는 한 캔 정도 당신이 딸 수 있는 공기를 선물하려 합니다.
내가 쓰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전부 희망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어쨌든 살아남았습니다. 당신도 사십시오. 당신 때문에도 당신 자녀나 당신 학생 때문에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다음 세대의 소문에 질식하지 마십시오. 숨 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