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시하고 관찰할 수 있는 한계
화요일의 브런치 책-들 너-들.
그 처음부터 C. S. 루이스가 쓴 책을 펴든 것은, 더욱이 그 책이 루이스가 평생 가장 힘든 순간을 관통하며, 다시 말해 동지처럼 밤이 가장 길고, 그 밤을 지새우고는 날마다 조금씩 해가 길어지기에, 아침을 당겨오는 승리의 시작, 가장 명백한 패배의 순간이 거역할 수 없는 승리로 바뀌는 때에 바로 그 때를, 그 역전을 기록한 책을 고른 것은, 고른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된 것이고,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일이란 게 그렇다.
A Grief Observed.
슬픔이란 게 당최 관찰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이 덮쳐오는 한가운데서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가. 홍수가 지나간 뒤에 흔적을 찾는 것처럼 지나고서 추체험하더라도 영영 실체가 불명확한 것은 아닌가. 우리가 슬픈 존재였음을 기억하고 목격할 뿐, 슬픔을, 뚫어져라 보는 것이 가능한가, 슬퍼하는 동안에?
루이스가 이 힘든 일을 했다.
그에게 퍽 어울리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쉬운 일이었을 리는 없다. 그래서 이 기록은 구상과 기획을 가지거나, 예감이나 추정을 좇아 간 것이 아니라, 파괴의 순간에 스스로 격리하여 파괴를 최소화하고 죽어야 한다면 죽기로 한 사람이, 그러나 어떤 것도 허투루 하지 않고 정말 진실대로 하려고, 그렇지 않다면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정신을 놓치지 않은 채 고스란히 겪어서 낸 글이다. 산통도 이런 산통은 없다.
루이스는 드라마에 나옴직한 뜻밖의 연애와 결혼을 했다. 그리고 이 결혼은 그에게 갑작스레 자녀들을 안겨 주기도 했다. 그리고 이미 병상에서 암 투병 중이던 아내 조이(작중 H로 명명된다)와 루이스는 잠깐이지만 회복기를 맛보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 짧은, 그래도 의사의 예고보다는 훨씬 길고 그래서 잠시 희망을 품게 만들던 시간은 끝이 나고 예정된 수순대로 두 사람은 사별한다. 그리고 살아남은 쪽은 이 세계에서 남겨진 자 특유의 바싹 마른 입과 갈라지는 목으로 정신을 표출하여 우리가 그 흔적을 만져 볼 수 있게 하였다.
‘진짜인 것reality들은 우상파괴적’이라고 루이스는 썼다. 진짜인 것들은 당연히 그렇다. 그리고 또 루이스는 “나를 포함하여 어느 시대 어느 인간이든 자신이 처한 상황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것은 감각이 주는 한계에 더하여 경험과 정신이 겪는 한계다. 그렇지만 그는 사랑하는이의 죽음이 ‘칼날’처럼 이 모든 걸 깨뜨리고 가르는 경험을 한다. 대개 그 순간 정신을 잃고 이 빈틈을 사후에 상상으로 덧입히는데, 그는 이때 눈을 부릅뜨고 졸지도 잠들지도 눈을 깜박이지도 않는다. 그는 “H를 원합니다. 그녀와 유사한 그 무엇이 아닌.”이라며 마치 그리스도의 강생을 갈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처럼 신과 드잡이한다. 그러면서 또 묻는다.
주여, 이것이 당신의 진짜 조건입니까? 제가 당신을 사랑하여 그녀를 만나든 만나지 못하든 괘념치 않을 때에만 H를 만날 수 있는 것입니까? 주여, 그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비칠지 생각하여 주소서. 제가 어린아이들에게 “지금은 사탕을 못 먹는다. 하지만 너희들이 자라서 정말로 사탕을 원하지 않을 때쯤이면 실컷 먹어도 돼”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리고 그는 네 권의 공책을 채워 갈 즈음에 “거기 어떤 ‘메시지’가 있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저 그녀가 거기 있다는 사실을 알며 그쪽으로 주의가 쏠리게 되는 것”을 안다. 영혼이 아니라 “정신이 내 정신을 잠시 동안 맞대면하고 있다는 인상”을 그렇게 설명한다. 그는 계속 설명한다. “기쁨도 슬픔도 없었다. 일상적인 의미로 말하는 ‘사랑’조차도 없는 상태였다. 그렇다고 ‘사랑이 아니다’라고 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중략) “지극히 즐거운 친밀함이 느껴졌다. 감각이나 감정을 매개로 하지 않는 친밀함.”
그리고서 그는 이 경험이 어디서 왔든지 “마음을 봄철 대청소하듯 깨끗이 씻어 주었다”고 적는다. “죽은 자는 그처럼 순수한 지력intellect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고 쓴다. 그 자신 이를 “무미건조하고 소름끼치는 생각처럼 보였다. 감정의 부재라는 생각은 혐오스러웠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이러한 접촉’을 직접 해 보니 거꾸로 “감정이 필요 없었다. 이 친밀함은 감정적 요소 없이도 완전한, 팽팽하게 긴장되면서도 원기를 회복시켜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친밀함이 사랑 그 자체일까?”라고 말한다. “이 세상에서 사랑은 언제나 감정을 동반한다.” 그렇다. 그렇지만 “순수한 지성과의 만남이나 친교는 차갑고 단조롭거나 매정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사람들이 영적인, 신비한 혹은 성스러운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와도 꼭 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더 나아가 자신의 경험을 할 수 있는 한 더듬어 묘사한다.
‘지력’이라고 말할 때 나는 ‘의지’까지 포함하여 말한다. ‘주의가 쏠리게 되는’ 것은 의지가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움직이는 지성intelligence in action’이라 함은 ‘의지의 최상의 형태will par excellence’를 뜻한다. 내가 만난 것은 결의로 충만한 듯 보였다.
루이스와 함께 묻는다.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러나 사랑이 아니라면 무어란 말인가.
이렇게 물을 수 있는 건, 우리가 아는 것 가운데, 그리고 알지 못하는 것 가운데 통틀어서 사랑처럼 풍요롭고, 그러니까 같은 뜻으로 불명확한 것이 어디 있는가 말이다. 불명확하다는 말을 오해하지 않기 바란다. 실체가 없이 모호하다는 말이 아니라 어떤 규정으로도 부족하다는 뜻에서다. 사랑을 가리키는 모든 형용은 그 전부가 필요하고 일리가 있지만, 각각은 사랑을 차라리 곡해한다. 어떤 뜻에서 사랑은 감각으로든 지성으로든 우리를 ‘초과’한다. 그리고 그 초과로 말미암아 사랑은 완벽한 타자처럼, 멀리 빛나는 별처럼 아름답지만 차갑고, 우리를 기쁘게 하지만 나락으로 쳐넣고, 우리에게 해답을 주지만 풀 수 없는 수수께끼를 던지며, 우리를 건져내지만 궁지에 빠뜨린다. 사랑에 대한 태도는 칼릴 지브란의 요청처럼 ‘비록 사랑이 그 날개에 깃털마다 칼을 감추고 있더라도’ 거기 안겨 찔리는 것밖에 없는 것 같다. 그렇게 고통을 받아들일 때에만 사랑과의 거리를 좁힐 수 있다.
루이스는 신을 길로 써서는 안 된다는 걸 안다. 신은 도구일 수 없다. 그렇지만 신이 길이 아니라면 어디 다른 길이 있겠는가. 그리하여 그는 순수한 지성, 순수한 지력, 순수한 지성체를 감지한다. 마치 신을 만나듯, 또는 신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초과를 극복한다. 스스로 변용하는 것이다. 하늘이 더 가까운 높은 산에서 예수가 변모하듯 사랑에 빠진 사람은 사랑에 인도되어 변모한다. 그리고 사랑하는이는 사랑하지않는이와 다르게 우리의 언어가, 다시 말해 개인을 넘어서서 집단이 만든 상징체계로도 전달 불가능한 사랑을 마침내 안다/한다. 지와 행이 겹친다.
이 사랑이라는 앎-함의 중첩의 결과물은 감정적 쾌락이나 안도 따위와는 비교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켜는 어떤 불도 꺼버리는 불 아래에서 비로소 우리는 진짜로 사랑을 고백하고 교환한다. 사랑밖에 없기 때문에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아직 다른 것이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진짜로는 사랑을 겪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잠수부가 구명조끼를 입어 해수면에 머무는 것과 같다.
모든 실체는 우상 파괴적이다. 지상의 삶에서조차도 세속의 연인은 그녀에 대한 우리의 단순한 개념을 끊임없이 깨뜨리고 승리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녀가 그렇게 하기를 바란다. 그녀가 힘을 다해 항거하기를, 모든 결점과 모든 예기치 못한 면모를 보여 줌으로써 선입견을 깨뜨리기를 원한다. 즉 ‘그녀’라는 확고하고 독립적인 실체를 통해. 그리하여 단지 이미지나 기억이 아닌 이 실체야말로 그녀가 죽고 난 후에도 우리가 더욱더 사랑해야 할 대상이다.
그러므로 나는 다음과 같이 옳게 말한다.
너를 사랑한다, 나를 절망케 함으로.
첫 책이 루이스의 [헤아려 본 슬픔]인 것은, 이것이 가장 ‘어쩔 수 없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비록 어릴 적이라서 그렇지 못했지만, 때가 맞았다면 이렇게 쓰고 싶었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서, 어른이 되었다.
나는 그러지 못했지만, 때가 되었는데도 어른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온전히 읽음으로써 문지방을 넘어설 것이다. 당신은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상상조차 필요치 않다는 것을.
전경자 선생의 번역으로 처음 접했지만, 지금은 절판돼서 구할 수 없다.
홍성사에서 펴낸 강유나 번역가의 한글판도 훌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