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을 걸다
수요일의 브런치 Spell: A Tarot Story.
Spell은 스펠링이라는 익숙한 어휘로 짐작 가듯 글자를 적는 것, 알파벳 철자를 쓰는 것을 말한다.
그렇지만 당신은 이 단어의 또 다른 뜻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주문을 걸다’ ‘마법을 사용하다’이다.
Spell이 가진 두 뜻은 다른 것인가? 하나가 다른 하나에 더하여진 것이다. 아니다. 이름이 그 존재를 호명하듯 모든 문자, 언어는 본래 마법이다. 정신계와 물질계를 엮는 것이 말이다. 한편 추상화하여 개념을 쥐게 하고, 한편 구체화해 행위나 사물로 실현하게 한다. 개인의 것을 공동의 것으로 바꾸고 공동의 유산을 개인의 자산으로 바꾸어 준다. 이것이 말이 하는 일이고, 말이 글이 될 때는 단단하고 영속화한다. 확정된다.
무언가를 확고히 하려는 것, 뜻을 꼭 실현하려 하면서 스펠, 글로 쓰기가, 또는 적기가 감행되는 것이다. 동서를 막론하고 부적 쓰기란 무언가. 알고 보면 그저 문자인 것이다. 픽토그램 같은 중간 형태도 있고.
오늘날 과학과 심리학이 자리를 대싱하긴 했지만 세계의 커다란 질서와 따로 또 같이 여전히 개인은 문제를 겪고 어떠한 해법도 완전한 해결을 주지는 않는다. 어쩌면 인간은 굳이 억지를 써서라도 흠을 찾고 트집을 잡는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자기의 결여를 견디고 갈증과 허기를 참고 누를 수 있는 사람은 적다. 참아야 할 때가 있어도 늘 꼭 참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인간이 결여를 채우는 데 두 가지 방식이 존재한다. 정확성 또는 즉각성. 한 사람은 자기 문제에 직면해 궁극으로야 정확한 답을 필요로 하지만, 지난 인류의 역사나 생명의 진화나 별의 진화가 보여 주듯이 맞는 답도 시간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짧은 수명이나 사건의 주기, 사건의 더욱 짧은 수명에 비추어 즉시 답할 것을 요구한다. 이 답은 때로 부정확할 수 있다. 이 답은 인지, 지식을 위한 답이 아니라 행동을 위한 답이기 때문이다. 행동할 때를 놓치면 어차피 다 망한 거다. 그러니까 즉시 무어라고든 말하라, 듣든 말든 답을 듣고서 내 행동을 취하리라. 그리하여 마법의 시대가 시작됐다. 주술과 신화의 시대. 실재와 환상, 힘과 거짓, 상승과 하강이 극적으로 만나고, 불합리와 초합리가 뒤섞여 분간하기 힘든 시절이, 아니 그런 사고가, 삶의 양식을 이루고 개인을 또는 집단을 살게 했다. 몽땅 헛것일까? 그러기에는 너무 오래, 이후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이성의 시기를 발톱의 때만도 못하게 왜소하게 만드는 긴 시간을 거기 기대어 살아왔다. 나는 그 시간을 모조리 부정하거나, 단지 운이 좋았다고 말할 정도로 간이 크지 않다. 해석과 표현에 문제가 있었더라도 그 시대의 정신과 문답들은 진실과 어느 만큼 연결돼 있고 유효하게 작동했으리라고 짐작한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주역과 점술, 자기계발서나 경영 서적, 유사고학과 종교, 더 친밀하게는 꽃점이나 화투점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그 대체물 또는 잔재 속에서 비슷하게 관계 맺으며 살고 있다. 타로는 이 무수한 점술과 불확실한 게임의 일부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자. 이 유행하는 도구는 유효한가, 잘 쓰는 방법이 따로 있을까? 먹히지 않고 먹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일단 타로는 예쁘니까.
심각하고 진지한 일을 좀 색다르게 풀어 보자. 나는 타로에 대해 이야기하고, 타로를 가지고 이야기할 것이다. 그래서 타로 이야기는 타로 내부에서 넘쳐나 외부로 연결될 것이다. 당신이 한글로 된 글을 읽고 한국말로 알아듣고 이해하듯이, 우리가 거는 마법은 당신이 일으키는 전환, ‘알아들음’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고 타로 카드는 맥거핀으로만 작용한다거나 실은 내가 아무말도, 아무것도 안 한다거나 하지는 않을 거다. 다만 정신을 마주하자는 거다.
접속. 첫 번째 마법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