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문턱(1) 문턱의 이쪽
# 이원성. 충돌과 반응
타로 카드 메이저 아르카나 22개 중 0번을 제외하고 두 번째 아르카나인 <고위여사제The High Priestess>는 일부에서는 여교황, 라파페세La Papesse이라고 소개하기도 합니다. 교황을 가리키는 여러 명칭 중 파파Papa/Pope는 ‘아빠’라는 뜻이어서 그 여성형인 파페세는 여성 아빠라는 말이 되어서 묘한 말이 되기는 합니다. 역사상 실존 여부는 증명할 수 없고 다만 대립교황 등 여러 교황이 동시에 있고, 공석인 채로 여러 해 가기도 하던 혼란기에 요안나라는 여교황이 있었다는 전설은 있습니다. 그 전설도 여러 판본이 있어서 매우 훌륭한 인물로 묘사되기도 하고, 여성이라는 사실을 감추고 교황 행세를 하다가 거리 한가운데서 아기를 낳는 바람에 성난 군중에게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다른 리더십에 대한 갈망과 상상으로 읽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일단 마르세유 타로 등 일부가 채용한 여교황 대신 대부분의 타로는 실존한 적 없는 여교황 대신, 인류의 역사에서 오랜 동안 존재했던 여사제 그룹을 채용합니다. 고위 여사제는, 일부 덱에서 교황 역시 고위 대사제로 명명함으로써 대등하게 이해되고 있음을 표현하고, 이를 읽을 수 있습니다.
제가 고위 여사제를 여교황으로 읽지 않는 데에는 다른 생각이 하나 더 있습니다. 여사제는 제도 종교의 업무 수행자로서의 사제일 뿐 아니라 마법사처럼 여전히 실제 신들린 사람, 또는 그런 신비에 사로잡힌 사람, 그런 신비를 전달하는 사람으로서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굳이 행정제도로서 최고위직을 뜻하는 것보다 신비로운 능력과 역할 때문에 한 단계 높은 사제인 것으로 이해하는 게 더 맞습니다. 일종의 샤먼이기도 하고, 학자이기도 합니다. 행정가보다는.
2번 아르카나 고위 여사제는 한편으로는 4번 아르카나 교황에 대응하지만, 1번 아르카나 마법사에도 대응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더 중요하고, 그다음 3번과의 연결이 중요합니다. 1과 3과 맺는 관련에 비하면 4와 맺는 관련은 거의 무시해도 좋을 것입니다.
마법사는 마법, 곧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방향을 부여했습니다. 곧 그것은 무엇이 선인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 두 명의 마법사가 있습니다. 두 마법사가 천행으로 일치하면 모를까, 아주 조금이라도 둘은 어긋날 것입니다. 1과 2의 두 마법사는 서로 다른 선을 지정합니다. 그럼으로써 한쪽의 선은 다른 한쪽의 악이 되고, 한쪽의 악은 다른 한쪽에서는 선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고위 여사제를 ‘처녀성’으로 독해하고, 이어서 메이저 아르카나 3번 ‘여황제’를 ‘모성’으로 해석하는 견해는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러나 ‘처녀성’보다는 ‘단독성’으로 읽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어서 3번 ‘여황제’는 모성이라기보다 매트릭스, 관련을 맺고 관계성으로 인해 각각이 존재하게 하는 수열, 체계를 부여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이 두 아르카나나 딱히 여성을 나타낸다고 해석할 근거는 없습니다. 특히 현대에는 성차가 개인차보다 크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의식화한 젠더를 뚜렷이 자각하는 건 나중이어도 이미 태어날 때에 젠더를 가졌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무어라고 미리 정하고 어떤 변화도 분화도 없을 거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초기값에 극히 민감하다면 그건 카오스이지 코스모스가 아닙니다. 초기값을 통제하는 것이 인간의 ‘앎’이 하는 일이라는 걸 생각하면, 세상 어딘가에 타로가 만들어지고, 마침내 당신이 타로를 들여다본다면 그것은 카오스에 맡기는 대신 초기값의 영향을 줄이면서 계속해서 새로운 권능, 다시 새로 결정하고 변경할 힘을 얻으려는 것이며,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곧 생물체로서의 인간이 또한 동시에 인간정신이기도 하다면, 이 인간정신이 살아간다는 것 자체, 존재의 영위가 곧 ‘변화와 생성’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메이저 2번 고위 여사제는 메이저 1번 마법사가 그런 것처럼 특정 성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마주치는 ‘타자’와 마주친 ‘자아’를 보여 줍니다. 남자든 여자든, 사회가 부여하는 지정성별이 어떻든 또는 개개인이 스스로를 어떤 성으로 정체하든 모든 사람은 처음엔 자기뿐이고, 나와 남을 구분하지 못하다가 차음 둘이 다름을 감각으로도 지각으로도 알아차리게 됩니다. 이 부딪침을 거부하면 영원한 아이, 피터팬으로 남는 것이고, 그에게는 원더랜드 말고는 살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부딪침을 수용한다고 해서 우리가 곧바로 만사를 헤쳐 나갈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이원성을 발견한 자는 자신과 세계에 대해 궁금할 수밖에 없고, 하나의 답에 언제나 쌍을 이루는 대립항을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한 번 너를 발견한 사람은 너가 보이지 않는 때라도 너를 상상하고 상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미지’를 ‘앎’과 ‘함’의 영역 안으로 들이기 위해 공부합니다. 탐색하고, 사색합니다.
처음으로 대립, 이분, 분화를 인식하는 자, ‘보는 자’[見者, seer]로서 고위 여사제는 ‘수렴’을 특징으로 합니다. 모든 지혜와 지식을 모아들입니다. 그가 만일 하심(下心)을 가지면 살고, 진화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냉담과 오만 또는 경멸에 빠져들지도 모릅니다. 여사제가 하심을 갖는다는 건 어떤 뜻일까요. 하심의 정체는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입니다.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뭇생명이 저답게 하는 것입니다. 곧, 진리에 대한 사랑(ㅣ)과 만민, 만유에 대한 사랑(ㅡ)이 ‘성장’의 동력인 것입니다. 이때 하심이란 ‘높음’을 알아 ‘모시는’ 마음, 체(體)입니다.
모든 사람은 처음에 자신의 완전성을 체험하고, 동시에 한계를 체험함으로써 완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싶고, 자기 결함을 드러내기를 꺼립니다. 이것은 다름아닌 여사제의 상태이며, 이원성이 가진 지혜인 동시에 한계입니다. 그는 누구보다 현명하지만 아무것도 행하지 않고, 어떤 입장의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고, 조언을 주지만, 그의 조언은 조언을 듣는 자가 처음 생각을 정반대로 바꿀 만큼 강력한데 정작 조언을 듣는 자가 ‘그럼 이제 이것이 답이냐’ 물으면 다시 그것을 부수는 논증을 하고 사례를 들 것입니다. 이러라는 건지 저러라는 건지 종잡을 수 없지만 그가 당신을 놀리는 것이 아님을 이해하십시오. 그는 문턱 앞에 서서 양쪽을 모두 바라보지만 이 방에 머물고 싶지도 않고 저 방으로 건너가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당신은 선택하십시오. 그리고 그 또한 어느 길이나 불완전하지만 그 불완전한 길을 걸어가기를 바라십시오. 어쩌면 여사제는 누군가가 강력하게 자리를 흔들고, 그래서 자신도 이미 깨진 완전성의 상에 매이지 않고 어디로든 옮겨 가기를 바랄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가 불완전한 길을 택해 불완전한 자신을 그 위에 올릴 때, 비로소 완전함은 구성되기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