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문턱(2) 문턱의 저쪽
#0과 1의 상실?
무구한 0과 축복받은 권능을 지닌 1로부터 떨어져 2에 들어서는 것은 아이와 어른 사이에 놓인 청소년을 닮았습니다. 청소년이라는 말은 모호해서 시작점은 아동기와 겹치고 종결점은 성년기와 겹칩니다. 말하자면 뒤죽박죽입니다. 벌써 어른인 모습과 아직 아이인 모습이 뒤섞여서 충돌하면서 나타나는 혼란과 미숙함이 흔히 사춘기라고 부르는 청소년기를 대표하는 이미지입니다. 그렇지만 2번 고위 여사제는 그렇게 어리거나 미숙하지만 않습니다. 그가 비록 멈추어 서고 회의(懷疑)하기는 하지만 그는 무기력하거나 회피하고만 있지 않습니다. 그는 꾸준히 공부하고 탐색과 사색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직접 행동보다는 간접 조언이기는 했지만 현실에도 관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결백함은 그를 어른으로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그는 가슴속에 깊이 결백을 간직하더라도 때묻고 더럽혀지기를 각오하고 밖으로 나서야 합니다. 자기가 발견한 이원성에 대해 발견자로서 지는 책임은 참여하여 둘을 다시 하나로 잇는 것, 둘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연결하는 것입니다. 이전의 0과 1을 완전한 이상향으로 볼 거냐, 그래서 상실한 자의 슬픔 속에 젖어 있을 거냐, 아니면 그것이 상실이든 탈피든 벗어나고 한 발 나아갈 것이냐. 2는 앞으로 만나게 될 어떤 아르카나와 비교하더라도 가장 굳센 최초의 결단을 내립니다. 2는 결정장애와 겉보기가 닮았지만, 충분한 자원과 동력을 갖추어 단지 마음을 정하기만 하면 된다는 데에서 결정장애와 다릅니다. 2는 아슬아슬하게, 찰랑찰랑하게 넘실대는 잔처럼 인식과 행위의 경계를 허물려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뚝.
#3의 탄생과 탄생시킴
앞서 메이저 아르카나 3번 <여황제The Empress>는 ‘모성’을 가리켜 2번 아르카나의 ‘처녀성’에 대비한다는 해석을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0번처럼, 1번처럼 2번도 성별을 한정해서 이해할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걷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0과 1은 모두에게 거저 주어진 것이며, 생이라는 직물을 짜는 씨줄과 날줄입니다. 인연 곧 인과와 우연. 그리고 2는 1의 출발이 반드시 마주치는 갈림길입니다. 어느 길이든 막다른 데라면 돌아설 것이고, 외길이라도 계속 나아갈지 돌아갈지를 결정하여야 하기에 최소한 양방향성을 가집니다. 그리고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피터팬으로 남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아이를 충분히 겪었다면 그는 기꺼이 창가에 설 것이고, 창문밖의 세계를 바라보고 ‘미래와 미지를 향한 그리움’을 경험합니다. ‘두려움’과 함께. 그리고 그 또는 그녀, 세상에 대해 타자인, 세상이라는 타자를 마주쳤기에 자신을 타자로 경험하는 한 사람은, 하나의 정신은 자기를 시험하기 시작합니다. 타자와 만나 어떤 일이 벌어질지, 나와 너가 이루는 우리는 어떻게 전개될지를 직접 부딪쳐 확인합니다.
3번 아르카나 여황제는 높은 생산성, 왕성한 활력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떠올리고, 세상, 하나의 체계, 매트릭스matrix를 떠올립니다. 매트릭스라는 말이 곧 어머니와 어머니로 말미암은 것들을 가리킵니다. 모성이며 모성의 결과가 매트릭스입니다. 매트릭스는 태어난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그렇기에 그것들은 무관하지 않고 서로 간섭하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일정한 규칙을 갖습니다. 그리고 우리 세계가 딱 그렇습니다. 과학과 종교의 모든 가능성, 정치와 예술의 모든 희망이 거기에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언가가 있다.
이 ‘무언가’를 태어난 내가 태어난 너로 경험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인격적 너이든 비인격으로 물성화한 너이든, 종으로서 사람이든 다른 숨붙이나 숨 쉬지 않는 사물이든 상관하고 조작하거나 기다리며 다른 결과를 얻고, 그것을 ‘재생산reproduction’할 때, 비로소 매트릭스가 생성됩니다. 당신은 모신(母神, Great Mother, Goddess, 어머니 하느님, …)이 되어 질서를 이해할 뿐 아니라 질서를 낳고, 나의 일부가 나 아닌 너로 진화하는 걸 바라봅니다. 그렇게 내게로 끌어들이는 수렴 대신에 나로부터 멀어지고 더는 내가 아니게 되는 너를 낳고 기르는 발산이 여황제 아르카나의 에너지 흐름입니다. 1에서 2로의 올라섬, 2에서 3으로의 도약 또는 뛰어-내림을 통해 우리는 문지방을 넘어 다른 세계로 들어옵니다. 여황제는 세계를 낳고 기릅니다.
3번 아르카나 여황제의 도안에는 풍성한 정원이나 자연이 그려지고, 앉아 있는 부드러운 얼굴의 여인 또는 화초에 물을 주는 여인이 등장합니다. 2번과 3번 모두 석류를 그려 넣기도 합니다. 다산의 상징인 석류는 그리스 신화에서 페르세포네와도 연결되고, 대지의 생산성을 상징해 이 여인이 곧 대지, 어머니 땅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카드는 여성이나 어머니와만 상관하지 않습니다. 헨델을 음악의 어머니라 부르는 것처럼 이 매트릭스의 생산자들은 모두 어머니로 불릴 만합니다. 단지 하나의 창조물이 아니라 질서를 드러내어 복제와 재생산을 촉진할 수 있는 것들, 여황제는 그 모두를 낳는 힘을 지칭합니다. 그래서 임산부나 기혼의 어머니보다도 더 자주, 가장 흔하게 여황제 카드를 뽑아 드는 이들은 문필가와 열살 안팎까지의 어린 여자아이들입니다. 저는 이들이 가진 언어적 재능이 인간정신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고 있구나, 라고 거꾸로 성찰하기도 합니다. 물론 문필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창조와 예술, 심지어 정치적 재능도 나타냅니다. 그는 끊어진 것들을 잇고 막다른 데서 길을 내며, 하나밖에 없는 데서 여럿을 상상해 냅니다. 그리고 이 모두에 차별 없이 공평하게 물을 줍니다. 생명을 주는 힘. 그것은 자신의 고립과 완결성을 스스로 버리고 기꺼이 타자와 만나는 여황제로부터 열립니다. 바로 이런 뜻에서 3번 아르카나 여황제는 최초의 ‘어른’입니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1번 아르카나 마법사가 아이일 수도, 원숙한 어른일 수도 있지만, 그래서 어떤 카드는 긴 수염을 기른 마법사 멀린을 그려 넣기도 하지만,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재(天才)는 논외로 하고 보통사람인 우리는 잘해야 인재(人才). 그러므로 인재인 우리는 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1—>2—>3으로의 아르카나 전환을 꼭 겪습니다. 그것은 일직선 위에 직렬하지 않고 1과 2과 떠받치고 그들을 지양하여 3이 나타나는, 1과 2는 서로 자기는 1, 상대는 2라고 인지하지만, 둘의 차이를 부정하지 않고도 충돌과 모순이 없게 하는 상위의 매트릭스, 3으로의 고양을 통해 최초의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 냅니다.
3번 아르카나는 켄 윌버가 명명한 “A Sociable God”을 떠올려 줍니다. 그리고 또한 마가렛 페터슨 타로에서 과감하게 묘사한 것 같은, 화면을 가득 채운 여성기(女性器)를 떠올려 줍니다.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의 작품 <세상의 기원>(L'Origine du monde)도 또한 떠오릅니다.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건, 그것은 ‘완전성’을 허물고 대신에 ‘현재’를 가져다 줍니다. 지금 생동할 것, 지금 살아 움직일 것을 명합니다. 완전한 이념을 실현하는 데에는 불완전함과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고, 처음 기대한 완벽한 계산에 도달하기 어렵지만, 대신에 이질적이고 불완전한 것들이 서로 간섭하고 끼어들어 전혀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우리에게 시련은 축복입니다. Bless의 어원이 피로써 거룩하게 함, 영광되게 함을 뜻하는 Blessen, 더 옛적에는 Bledsian인 것처럼.
신에게는 영원을.
인간에게는 현재를.
당신이 하십시오. 이제 어른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