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ll: A Tarot Story. 4와 5(1)

질서에 관하여(1) 통제 혹은 통치under control

by 이제월



#모성과 부성

모성애가 실재하는가, 조작된 신화인가 하는 논란은 여전히 끊이지 않지만, 그게 실제에 기반한다 하더라도 조작 또는 이상화가 진행됐다는 점도 똑같이 사실이다. 부성애도 그만 못하지만 역시 신화와 신화화하려는 시도가 있어 왔다.

타로 카드 속에서 모성 또는 부성을 대표하는 카드로 3번 아르카나 여황제와 4번 아르카나 황제가 지목되곤 한다. 그렇지만 1-2-3번에 이르는 성장과 어른됨의 길은 성별과 문화와 상관없이 존재를 지닌 존재자라면 누구라도 거칠 일이다. 그가 자신의 자유를 구체화하면서, 거꾸로 그 자유의 실현은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라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 그래서 타자와 연결됨을 기꺼이 감당할 때, 매트릭스가 구성되고, 그 세계의 연기(緣起)가 파도 친다. 그래야 산다.

매트릭스를 낳는 것을 모성이라고 부르자. 그렇다면 매트릭스가 유동하는 가운데 틀을 지운다면, 이 틀지우기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는 무한에 비하면 작지만 역시 거대한 무제한의 생명력, 야생의 힘을 길들이는 일이다. 길들이기, 문명화 또는 질서의 부여, 통제라고 부를 수 있다. 통제는 자연한 세계를 사회로 구성한다. 자연한 세계 속에서도 관계가 있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이러해야 하는 것은 없다. 저절로 그랬고, 혹시 안 그렇게 하더라도 그러함에는 차이가 없다. 낳은 것들은 서로를 먹고 먹인다.

관계에 규율을 부여하고, 그러해야 한다고 할 때, 그러해야 한다고 질서를 세우거나, 그러하도록 강제하는 것이 말하자면 아버지다. 혁명 이후의 인류는 통제를 억압으로 곧장 이해한다. 시민의 자유나 저항이 아름답고 정의로운 것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라고 한 것은 차치하고, 만화 <리니지>가 그려낸, 신화에서 현실로 넘어오는 다리 같은 세계에서 사람들은 왜 그렇게 혈통에 집착했을까? 그들은 결국 빤히 보이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왕자를 그냥 왕자로 인정하진 않는다. 그가 무엇을 지킬 수 있는지, 그가 보증하는 것에 걸어 볼 만한지 가늠하고서야 왕자임을 ‘믿는-다고 한-다’.

그것은 지금처럼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고, 계몽주의의 영향과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 이후 널리 퍼진 보통교육의 결과 일반 시민의 자질이 상당한 수준까지 균일하게 상승하기 전의 세상 속에서, 서로를 신뢰하고, 등 뒤를 안심한 채 각자 추구하고, 조금이라도 더 나아가기 위해서 갖는 약속, 서로를 연결해서 한 세상을 이루는 약속의 ‘기초’ 같은 것이었다. 요즘 말로 하자면 사회적 자본이나 사회신뢰자본 같은 말로 바꾸어도 좋겠다.

고대 신화에서는 늘 태어나지도 않은 아들, 아니면 갓 태어나 어린 아들에게 장성하면 찾아오라며 그 어미에게 징표를 맡기고 떠나는 아버지가 등장하며, 잘 크던 아들은 자기 정체성을 갖지 못하고 부정당하다가 굳이 고초를 겪으며 떠나 자기를 반기지도 않는 사람들 무리 속에 들어가 아버지의 인가를 받고, 왕위를 잇거나 제 땅, 제 나라를 세우는 데 이른다. 상당수의 건국 신화는 이렇게 사생아나 고아가 아닌가 의심스러운 이가 문득 등장해 그 사회 질서를 대표하는 왕으로부터 인정받고 후계를 잇거나 새로 대업을 일으키는 이야기다.

이미 양성이 아닌 다성 사회에서 이를 애써 남녀에 짝짓거나, 거꾸로 남녀에 짝짓는 것으로 이해해 반발하는 강박은 둘 다 피하자. 우리는 오래된 상징 체계로서만, 한 사람 안에 깃든 아니마와 아니무스, 어느 사람에게나 있는 양과 음의 양극성으로서 이걸 이해하고, 뒷바라지하며 살뜰히 챙기는 모성과 앞바라지하며 호되게 훈련하는 부성을 상상하자. 타로 카드에서도 모성은 주로 무한한 애정을, 부성은 주로 단호한 규율과 통치를 보여 준다. 둘 중 어느 것이 우등한가는 속성 자체가 아니라 속성이 마주친 세상, 그 시절이 정하는 것일 터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는 양자를 오가며 왼팔과 오른팔을 쓰는 것처럼 둘 다 쓸 거라는 점이다.


#변화하는 상

자전축이 세차 운동을 하듯, 자기장의 축이 흔들려 자북이 끊임없이 이동하듯, 생물학적이고 경험적인 상이든 사회적이고 이념적인 상이든 계속 변화한다. 우리는 변화를 부정하거나 거스를 수 없고, 다만 퇴행이 아닌 발전이 되도록 고민하고 올바른 방향을 합의하고 그 흐름을 만들려 애쓸 뿐이다.

그런데 남녀 가운데 여성상의 변화가 세찼다면 부모로 눈길을 돌리면 부성에 대한 이해, 아버지상의 변화가 더 극적이다. 아버지는 더 이상 엄하기만 하지 않다. 더 없이 절절하여 모성과 분간이 되지 않는 모습으로도 나타나고, 단일한 모성상이 해체된 것처럼 부성상도 해체된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분명한 추이가 있다. 부성상의 이동 경로는 더 부드럽고, 더 유연한 쪽이 되고 있다. 그는 한때 만연한 독재자나 강력한 지도자상이 그려낸 것처럼 가부장으로서 가족들을 살리기 위해 가족 일부를 기꺼이 희생하는, 어차피 희생시키면서 가슴 아픈 걸 참는 모습이 아니다. 체벌을 가하고는 매맞은 자식에게 때린 내 마음이 아프다고 하는 부모상은 사라져 가고 있고, 사라져 가야 한다. 타로 체계 안에서도 새로운 아버지는 어머니처럼 낳지는 못해도, 물심양면으로 온 정성을 다해 기르고, 이를 위해 인내하고 부서지면서,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만 자신을 완성하고 큰 나무처럼 자라게 하는 상으로 변화하기도 한다. 목자의 이미지, 또는 숲의 정령 쯤으로 이해할 수 있는 아버지상이, 또는 군주상이 하인들 타로에서 나타난다. 이 덱은 마이너 아르카나에서도 네 개의 수트에 네 개의 방위와 네 개의 문명 전통을 담아 독특함을 더했는데, 그게 가벼운 재밋거리가 아니라 진지한 고찰의 결과로 나타난 수작이다. 메어지에서도 백조의 목을 날카로운 손톱으로 그어 버리는 <바보>(0. The Fool)와 같이 새로운 관점을 돕는 이미지들이 넘치는데, 그중에서도 큰 변화를 성공적으로 이룩한 예로 <황제>(Ⅳ. The Emperor)를 들고 싶다. 거기에는 나무와 거의 한 몸이 된 보일 듯 말 듯한 반라의 중년 남성이 그려져 있다. 그는 사람인지, 이미 나무나 대지와 한 몸이 됐는지 알 길 없게 선과 색이 흡수돼 있다. 더는 징발하고 징벌하며 감시하는 존재가 아니라 묵묵히 돕고 지켜 주는 이미지다. 그런가 하면 전통의 황제 카드가 애써 변호한 황제 아르카나에 대한 모든 미화를 해제하고 깨진 유리 같고 가누지 못하는 불길 같은 상을 강렬하게 재현한 마가렛 페터슨 타로도 있다. 클래식 타로와 모던 타로의 다수가 선택하는 고전적 황제의 모습도 정면을 보는 당당한 면(예를 들면, 웨이트 계열)과 측면을 그려내고 세운 방패를 통해 의심 많고 연극적인 면(예를 들면, 마르세유 계열)을 부각시키는 예도 있다.


우리는 각자가 모든 걸 다하지 않는다. 어떤 건 내가 하고 어떤 건 다른 이가 한다. 사실 거의 전부 남이 하고, 나는 온힘을 다해 성실하게 한 때조차 어느 한 몫을 전부 혹은 일부 해낼 뿐이라는 것이 정당하다. 그래서 타로 카드 메이저 시스템에 그려진 성장의 계열이 나와 같지 않다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하지 않은 동안 다른 사람이 한 일들과 맞물려, 그렇게 합이 맞을 때에 합이 맞은 만큼씩 이 사회는 성장한다. 한 사람의 영웅이나 독재자가 진로를 틀거나 재촉해봤자 고무줄이 줄어들듯 태엽이 도로 감기듯 우리는 제자리로 돌아가 다시 해야 할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거저 얻거나 선물받은 듯 여겨지는 역사 발전은,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충분히 알지 못했다는 반증일 것이다. 이 찌질하고 제 앞가림도 못하는 동료 인간들, 이웃사람들은 하지만 저마다 생생한 혼과 조명된 영으로 어쩌면 기적을 일으키는 서로에 대한 ‘초과’로, 과분한 사랑으로서 존재하고 주어지는 것 같다.


그리고 미성숙한 황제가 제 기준을 강요하고 외적 질서와 딱 맞춰진 모습에 매달린다면, 성숙한 황제는 말하자면 마침내 시민의 힘을 믿고, 그 신뢰와 개방을 통해 텅 빈 광장에서 모두의 목소리가 점차 하나로 모아지고,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을, 그래서 자신도 거대한 질서의 한 부분으로 충실하고, 이것으로 충만할 것이다.


아, 민주주의의 시대다. 거칠고 흠많지만. 나도 당신도 모두 황제다. 모두 황제니 얼마나 웃긴가. 전국민이 로또 1등에 당첨되면 5등의 당첨금 5000원보다도 적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익을 얻는 주주로서가 아니라, 주인이라는 것은 부분이 아니라 ‘전체에 대한 책임’을 자각하고 고민하고 모든 결과를 감내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니까, 당신도 황제다. 당신이, 내가 황제다.

작가의 이전글Spell: A Tarot Story. 2와 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