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ll: A Tarot Story. 4와 5(2)

질서에 관하여(2) 조언 혹은 경청Listen and Advice

by 이제월


#신비로운 기원?

타로 카드의 신비로운 기원에 관한 가장 강력한 주장은 연금술을 비롯 거의 모든 오컬티즘이 집결하는 원조로서 이집트 신 토트가 써서 남겼다는 신비로운 에메랄드 서판들이다. 연금술과 여러 오컬티즘의 원조로서 토트를 호명할 때 토트 신은 그리스 신화의 헤르메스하고도 연관되어 동일한 존재의 다른 화신(化身)으로 취급된다. 이때에 그 이름은 헤르메스 트리스메가스토스이며, 타로 카드와 연결시키려는 주장에서 그 서판은 78개이고, 우주 법칙과 비전을 새긴 이 한 묶음의 타블렛을 ‘지혜의 서’라고 부르는데, 타로 오컬티즘에서는 각 서판의 신비로운 가르침을 압축한 도안이 바로 타로라고 주장한다. 나는 이 신비스런 기원을 아주 의심스럽게 여긴다. 비단 문헌학적 증거가 전무해서만이 아니다. 워낙 비밀스럽게 전해 와서 그렇다고 아무리 주장한들 그러한 비의로서 타로를 바라본다면 상징 하나하나를 아주 정확하게 해석해야만 하는데, 타로 사용자들이 인정하는 고전 타로들 가운데 그처럼 딱 들어맞는 통일성은 보이지 않는다. 도리어 다른 문학적 상징들을 해석하듯 그 시대에 유행하는 관념과 역사적으로 형성되고 해체되는 상징들이 거기 남아 있을 뿐이다. 타로는 실제로 가문의 행사나 가문들 사이의 결혼을 기념하여 그려지는 일이 많았고, 그런 때에 거기 담기는 상징들은 이 가문들의 고유한 상징과 고유한 해석의 알고리즘을 담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만 이런 주장은 타로 제작자들에게 크게 영향을 미친 것 같아서 각각의 아르카나에 어떻게 공들이고 어떤 부분을 고민했는가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된다. 그중에서도 첫 세 장은 아주아주 중요한데, 프란츠 바르돈은 자신의 첫 저서들을 각기 마법사, 고위여사제, 여황제 아르카나의 해석으로서 저술했다. 그러니까 [[헤르메스학 입문]]은 통째로 ‘마법사 카드’를 풀이한 셈이다. 넷째 장인 황제 카드에 대한 해석으로서 쓴 책은 10개 장으로 구성하였는데 3개 장만 남아 있고, 에메랄드 서판의 다섯 번째 장인 교황/고위사제 카드에 대한 해석은 책으로 쓴 적이 있는지 불분명하다. 아무튼 카발리스트들의 비전을 담은 생명나무-세피로트의 열 개 세피라를 잇는 22개의 길은 22개의 히브리 문자와 대응하게 짜여 있고, 타로 카드의 메이저 아르카나 22장과도 조응하는 것이라 주장된다. 최초의 연결이 사실인지 신화인지 사기인지는 알 길이 없어도 일단 한 번 그렇다고 생각된 뒤에는 그렇게 의도하여 만들어진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오래된 작품들을 반복 재생산하며 새로운 덱들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원본은 영원히 찾을 수 없는 이 사본들의 세계, 시뮬라크르로서 타로 카드의 덱들은 이제와서는 어쨌거나 현대 작가들의 지식과 의도 여부를 떠나서 바로 저 신비주의 전통들과 연결되고 해석상 도움 또는 방해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마법사 카드는 세상의 진짜 법칙들 곧 마법 법칙들을 이해하는 입문자에게 장차 마주칠 세계 전체의 비전을 압축해서 보여 주는 것으로서, 고위 여사제 카드는 진정한 존재 및 환상들을 불러들이는 소환 마법의 안내서로서, 여황제 카드는 여기에 대한 바르돈의 책 제목이 [[진정한 카발라의 열쇠]]라는 데서 추측할 수 있듯이 생명의 원리, 탄생과 소멸의 원리를 담고 있다. 황제 카드는 세상을 ‘다스리는 지혜’를 담고 있었고, 교황 카드가 무엇을 담고 있었는가는 바르돈보다는 마법적 권위가 한결 덜한 사람들의 안내를 따르거나, 현대적인 심리학 또는 신화나 상징 연구자들의 안내에 기대어야 한다.


#상징에서 은유로

그러나 나는 다른 접근을 제안하고자 한다. 많고 많은 타로에 관한 이야기에 내가 나서서 보태는 것은 불온한 뜻을 품어서인데, 타로 마스터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재생산하는 이야기들 대신에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저 이야기들은 타로를 고급 기술로 남겨 놓고, 마치 어떤 정규 과정을 밟아야 할 것 같은 전문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그러나 나는 아주 평범한, ‘교육받지 않은’ 사람들이 타로를 잘 이해하고 잘 다루는 것을 오랫동안 지켜보았으며, 그것은 자연 자체를 관찰하는 사람이 가장 뛰어난 과학자나 예술가, 심지어 삶의 지혜를 꿰뚫는 스승이 되는 것과 무척 닮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타로를 어떤 초자연적 도구로 보는 견해를 회의(懷疑)하고 시각이나 청각, 균형감각이나 운동감각처럼 단순하고 자연적인 감각의 연장(延長)이요, 도구로서 바라본다. 처음 이 글을 시작하며 언급한 ’78개 낱말로 된 언어체계’인 것이다. 눈을 가리키는 수십 개의 낱말을 가진 사람들에게 고작 몇 개의 말로 눈을 가리키는 문명이 부정확하거나 불충분해 보일 수 있지만, 이런 식의 미끄러짐과 어긋남은 언어와 언어 사이에 흔한 일이다. 더욱이 같은 문화 안에 있는 두 사람이 하나의 단어를 정확하게 같은 뜻으로 쓸 가능성이 끝없이 0에 수렴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소통이란 구제불능한 과제이거나, 그 부족함과 부정확함을 안고서 주거니 받거니 리듬을 타고 ‘실행됨으로써 의미의 존재를 확인’하는 수밖에 없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나는 그렇게 받아들였고, 당신에게도 그렇게 받아들이기를 권한다. 어쨌거나 우리는 살아갈 거니까. 그러자면 당신은 상징에서 은유로 사유와 느낌의 감각을 옮겨가야 한다.


상징과 은유는 다르다. 상징은 이것과 저것을 연결하며 이것은 실상 저것이어서 저것을 알고 나면 이것을 폐한다 은유는 다르다. 은유는 이 세계와 저 세계 두 개의 질서를 연결한다. 그래서 쓰인 말 이것은 이것이 속한 질서 가운데 이것의 위치와 움직임으로 계속해서 유효하다. 이것을 통해 드러낸 저것들은 본래 말할 수 없는 것, 말로 하기 어려운 것인데 익히 아는 이것을 통해 불려옴으로써, 이것을 창으로 삼아 온전히 또는 충분하게 알려진다. 상징은 계산식과 기호라면 은유는 은폐된 것들의 계시다. 그래서 상징은 아는 자를 위한 것인데 은유는 모르는 자를 위한 것이다. 상징은 열쇠고 은유는 그냥 확 열린 하늘이다. 먹구름이 걷히고 쩡 하며 해가 나면 그 빛은 온데 비치어 만물이 제 색깔을 찾는다. 그래서 상징은 수수께끼이지만 은유는 밥이고 구원이다. 상징과 은유 모두 비밀에 관계하지만 상징은 비밀을 지키는 자이고, 은유는 비밀을 없애는 자이다. 다만 신비롭게도 양쪽 다 알아들을 사람만 알아듣는다. 신비의 문턱은 신비 자신이니까.


조금 억지를 쓰자면 상징은 계급을 만들고 은유는 평등을 퍼뜨린다. 그리하여 어떤 이에게는 못마땅할지라도 민주주의는 퍼지는 것이고, 귀족주의가 산문적인 데 비하여 민주주의는 언제나 시적이다. 보통 옛것에 씌우는 환상의 영향으로 과거가 신화적이거나 낭만적이고 현대는 무미건조하다고 하는 생각이 퍼진 줄은 알지만, 나는 막 밝힌 견해의 연장으로 우리가 산문을 닮은 사회에서 시를 닮은 사회로 옮겨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타로도 논문이나 산문을 쓰는 대신 시를 쓰면 좋겠고, 시로 읽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교황의 이해. 자리로서.

메이저 아르카나 중 Ⅴ. The Hierophant, 고위 사제, 교황 카드는 방금까지 이야기한 분위기에 가장 안 맞는 인물일 수 있다. 어쩐지 너무 산문의 느낌이 들고 고리타분하지 않는가? 정말로 그럴지도 모른다. 그리고 안 그럴지도 모른다.

교황 카드는 황제가 보여 주는 부성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과 관계 맺는다. 황제가 질서를 세우고 규율한다면, 교황은 전통 질서를 끊임없이 재해석한다, 무엇보다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역사상의 황제나 교황이 카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본질적으로 그들이 수행했어야 하는 역할에 상응해서까지다. 그 이상은 뭐랄까, 현실했던 황제와 교황 대부분은 실패하거나 겨우 겨우 망하는 걸 피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그들의 기능과 역할을 상상하고, 좀 더 상상해서 이랬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고 생각을 이어갈 수 있다. 교황은 그 자리(status)로서 무엇인가. 그는 권력자라기보다 권력을 비우고, 신에게 바치고, 그 빈 자리를 아무도 차지할 수 없게 지키는 문지기나 비서여야 한다. 그는 어디까지 대행자이고, 왕명을 전하는 비서처럼, 신명(神命)을 전하는 비서다. 그리고 신은 출렁이는 자연으로 늘 발설하지만 다른 뜻으로는 영원한 침묵 속에 계신다. 그리하여 교황은 말하는 자이지만 침묵하는 자이고, 그럼으로써 사실 자체가 사물들이 직접 말하게 하는 자이다. 그것이 진정한 조언이고, 좋은 상담자는 언제나 좋은 경청자라는 사실과 어울린다. 그러니까 그는 무엇을 요구받든 자리를 지킴으로써 나머지 것들도 제자리로 돌아오게 한다. 그는 스스로 비어 있지는 않지만 빈 자리를 빈 자리로 지켜지게 한다. 그것이 신성의 수호자이다.


#교황의 이해. 운동으로서.

권력을 비움으로써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조언자의 특징이다. 예컨대, 나는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직접 안내할 때도 많지만 그건 주로 집합적으로 상대할 때이다. 일대일 관계에서, 얼굴을 맞대고 육성을 주고받을 때, 또는 카카오톡 메시지 같은 것을 주고받을 때 나는 묻고, 생각하고 의지(意志)하고 원의(願意)하기를 격려한다. 그리고는 기다린다. 묻고 기다리기의 반복. 그러나 조금씩 나는 안내하고도 있는데, 그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라 그 자신은 미처 읽지 못하고, 차마 읽지 못하는 학생 스스로의 의지다. 잠자거나 달아나는 그를 붙들고 그 스스로 깨어나고 그 스스로 말하기를 기다린다. 그런데 경청이나 기다림이 꼭 가만히 있거나 아무런 말도 안 하는 것을 뜻하는 건 아니다. 나는 적절한 ‘다른 이야기’를 함으로써 그가 달아나는 나쁜 ‘다른 이야기’들과 그를 분리한다. 그렇게 분리된 가운데 그는 비로소 고유한 운동을 하기 시작하고 점점 자기 리듬과 자기 음색이 뚜렷해진다. 그러면 어느새 스스로 물음에 답하고, 문제의 성격과 핵심을 짚는다. 어떤 학생들은 발가벗겨진 느낌, 탄로난 느낌을 받기도 하고, 깊이 수용되고 위로받은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든든한 후원과 신뢰를 등에 업고 뭐든지 해낼 것 같은 자신감과 권능감을 맛보기도 한다. 물론 무기력하거나 회피하려는 기세가 강화돼서 발작하듯 억지를 피우고 분노하거나 오열하기도 한다. 그 모든 일은 같은 작용이고 같은 반작용이다. 그들은 자신과 마주하는 것이다. 스스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자신을 조언자라는 형식의 조력자를 통해 피하거나 어긋나지 않고 만나는 것이다.


어떤 뜻에서 나는, 개인적 상징을 찾고 풀이해 주는 대신, 오히려 그것들을 보편적 은유로 이끄는 일을 한다. 한 개인이 참으로 그다울 때는 그가 단절의 결과로 고립되는 대신, 제자리에서 충분히 그리고 온전히 세계와 연결될 때이다. 모든 개인은 사회적 개인인 것. 나는 그와 연결하고 끊기지 않음으로써, 단지 그럼으로써 그가 의심의 방식을 버리고 신뢰의 방식을 택할 기회를 준다. 그건 그의 상태에 따라서, 그의 태도와 기질에 따라서 다정하거나 매몰차거나, 응원하거나 의심하거나 하는 온갖 관계맺음의 행위들 전부를 순차적으로나 동시적으로 동원할 수 있다. 나는 선택하지만 내 뜻이 아니고, 내 능력에 제한받지만 내 개인성에 최소한으로 영향받도록 애쓴다. 그러니까 할 수 있는 한 노력하지 않고자 가능한 최대로 노력하는 것이다.


조언은, 언제나 촉매다. 조언자는 매염제와 같다. 그는 자신에 물들 것이다. 나는 그 물듦을 돕는다. 물론 내 흔적도 그에게 남을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나는 모든 색깔에 상관하며, 단지 그는 자기 자신의 색으로 물드는 것이다. 내가 적극적인 부분은 다른 색이 그에게 물드는 것에 맹렬히 저항하는 것이고, 거기서 나는 지극히 개인이다. 자기 색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좋거나 나쁘거나. 그러나 조언자로서 내가 조언하는 그들은 내 영향을 받되, 내 영향을 더 받도록 한다. 그들은 나를 강하게 경험하고도 더욱 자유롭게 멋대로 군다.


학생에게 교사는 자유를 건드림으로써 더 자유케 하는 이상한 존재다. 그런데 그것은 이상한 게 아니고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것이다. 우리는, 곁에 선 안내자들은 당신을 부른다, 그리고는 쫓아낸다. 왜냐하면 내게 오란 것이 아니고 네 개의 벽에서 벗어나 제 갈 길을 가라는 것이 바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먼저 문을 찾고 문 앞에 서서 당신을 부른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내게 가장 가까이 온 순간, 다시 말해 문앞에 다다른 순간 문을 열고 나가도록, 그러므로 내게서 멀어지도록 밀쳐낸다. 그러나 당신이 정말로 자유롭기에 당신은 올 수도 오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기다리지 않는다. 둘 다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둘 다 나쁠 수도 있지만, 나쁜 것은 전부 조언자의 일 바깥에서 벌어진다. 우리는 오직 좋은 일로 연결된다. 신비롭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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