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균형. 일단락.
#Lucky? Balance!
당신은 ‘7’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어쩌면 ‘럭키 세븐!’ 하며 당연한 거 아니냔 표정을 지었을지 모르겠습니다. ‘7’은 흥미로운 수입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자수를 매우 잘 놓는 한 여인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야기 속에서 아마도 이름이 아라크네인 그이는 빼어난 미모와 솜씨 덕에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데, 자신도 자기 실력을 잘 알고 있었고, 당대의 평균적인 사람들처럼 겸양하거나 신들에게 영광을 돌리는 대신 신들도 자기보다는 잘할 수 없을 거라고 공공연히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아테나 여신이 볼품 없는 노파의 모습으로 그 도시를 찾아갔고, 그이와 내기하여 어쩌면 당연하게 승리한 뒤, 패배에 놀란 그이 앞에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며 오만을 꾸짖고 저주합니다. 그 저주로 그이는 평생 자수를 놓는 동물이 되었다고 합니다. 예, 아라크네는 거미입니다. 이야기를 듣고 겸손해야 한다는 교훈을 떠올릴지 신들의 부당함에 분개할지, 인간의 무력함에 고뇌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건 아테나 여신은 과연 무얼 수 놓았기에 승리하였느냔 겁니다. 이야기의 세부로 들어가면 아테나는 처음에 아라크네에게 밀렸습니다. 그러자 보통의 방법으로는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인간에게 불가능한’ 작업을 해내 보입니다. 아테나는 무엇을 수 놓았을까요?
정칠각형. 모든 변의 길이와 모든 내각의 크기가 같은 정다각형, 정삼각형부터 무수한 정다각형 도형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변의 수가 늘어날수록 그 형태는 원에 가까워집니다. 그런데 정삼각형, 정사각형, 정오각형, 정육각형도 만들 수 있고, 정팔각형도 작도할 수 있지만 정칠각형은 작도할 수 없습니다. 1을 7로 나누어 보세요. 무한소수, 그것도 비순환소수가 나옵니다. 즉, 우리는 정확히 나누어 떨어지는 지점을 찾을 수 없다는 겁니다. 당연히 7분의 1에 해당하는 지점이 있을 테지만 우리는 그것을 콕 집어 나눌 수가 없습니다. 무슨 재주인지는 모르니까 설정상 신이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깁시다. 아무튼, 불가능한 것, 그런데 실재하는 것. 7은 그런 신비로운 수입니다. 서수로 생각해서 일곱 번째, 혹은 1을 일곱 번 쌓은 것을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더하기’나 ‘곱하기’는 1의 꾸준한 반복일 뿐, 새로운 수가 아닙니다. 수의 성질을 알려면 빼고 나누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하에서 정칠각형, 칠로 나눈다는 행위는 수비학의 이해에도 반영돼서 이런 불가능성을, 마치 지리상 도달불능점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7’은 설명불가능한 행운을 가리키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냥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열심히 갈던 밭에서 어느날 싹이 움트고, 어느날 예기치 못한 열매가 가득 달리는 것에 더 가깝습니다. 7의 기적은 하늘보다는 땅에서 비롯합니다. 그리고 하늘과 땅은 사람의 노력에 감응해서 응답합니다.
모든 노력이, 모든 바람이 성취되지는 않습니다. 올바른 노력만이 올바른 결과를 가져다 줍니다. ‘7’은 인간의 행위가, 지상에서의 노력이 합당하였음을 인증하여 줍니다. 그래서 마이너 아르카나에서 7은 ‘풍성함’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메이저 아르카나의 세 층에서 첫 번째 ‘완성’을 보여 주는 . The Chariot, <전차>는 단순한 결과가 아니라 온전한 뜻에서 그러하다고 가리킵니다. 곧, 풍성할 만하여 풍성하다. 대부분의 타로 카드는 전차 아르카나를 묘사하기 위해서 여러 형태의 수레와 수레에 올라탄 사람을, 그리고 무엇보다 둘 또는 그 이상의 말이나 용, 사자, 스핑크스 등을 그려 넣고 있습니다. 이런 도상이 표현하는 것은 그가 이질적인 것들을 조정해 자기가 탄 수레가 뒤집히지 않도록 잘 조정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언가’ 물을 때 이 카드를 뽑았다면, 그러고 있다는 의미보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뜻인 겁니다. 질문에 따라 답은 다르게 읽히는 겁니다. 타로 카드는 딱 78 단어로 된 언어 체계니까 한자어가 명사였다가 동사였다가 하는 등 변화하듯 카드 한 장 한 장의 의미를 알맞게 구부리고 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구부르고 어떻게 펴는가는 질문에 달려 있으므로, 질문을 바르게, 제대로 구성해 던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시 ‘전차’ 이야기로 돌아가서,
옛적 공자는 사사로운 개인에서 공직을 맡든, 맡을 차비를 갖추는 데 머물든 공인으로서, 공적 존재로서 학인, 배운 사람, 선비가 갖추어야 할 소양을 얻기까지 꼭 배워야 할 여섯 가지를 추려서 육예(六藝)라고 하였습니다. 주례에 남아 있는 육예는 예악사어서수(禮樂射御書數) 여섯 가지이고, 이중 ‘어’는 임금의 말씀, 그래서 꼭 따라서 이루어야 하는 명을 뜻하는 어명에 쓰이는 그 ‘어’ 자입니다. 어는 무엇을 가리킬까요? 선비가 그저 훑어 암기하는 것 말고 몸소 배워 통달해야 할 일들로 여긴 육예 중 ‘어’는 바로 ‘말을 타고 수레를 모는 일’입니다. 이것들은 어느 만큼은 단계적으로, 어느 만큼은 동시다발로 연마하는데, 한 번 시작하면 계속 정진합니다. 관직을 세습하던 시절, 그 시절에는 사회 시스템이 미비하여 그때의 생산력으로 갖출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책이 세습이었습니다. 아예 작정하고 어려서부터 배우고 익히게 한 것입니다. 인생이 미리 결정된다는 측면에서 이 ‘미래의 무엇’들은 현대인의 눈으로는 아무리 특권층이래도 행복하달 순 없겠습니다. 그는 ‘누구’가 될 수 없고 ‘무엇'으로 길러지니까요. 이 시스템 안에서 기성 세대는 신진들이 어느 정도 성장했으며, 언제 일을 맡겨 시작할 수 있을까 가늠하느라 서로 묻고 상의하였겠지요? 그때 당신 아이는 이제 얼마나 컸소, 또는 벼슬길에 나갈 만한가 물을 때, ‘어’를 익혔다고 답한다면, “수레를 몰 줄 압니다”라고 답한다면 준비를 마치고 출사할 때가 되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질적인 것, 상이한 것들을 다루어 한 방향으로, 뜻한 대로 몰고 가는 것. 이 힘은 우리가 탈 배, 생활을 잘 영위하게 하여 줍니다. 그것은 곧 나 아닌 타자에 대해 지니는 민감함에 다름 아닙니다
그런데 모든 건강함은 더한 건강함을 감지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나쁜 것은 더 나쁜 것을 부르는 힘이 있고요. 경사로를 구르는 공처럼, 쏜 살처럼. 워라밸이라고 일과 개인생활의 균형을 잡는 것에 대한 목소리가 많았고,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거기 도달한 사람들, 유능하고 자기 조절을 잘한 사람들이 궁극에는 자기 삶의 결여를 발견하고 빈틈을 메우려 합니다. 도처에 널린 마음수련, 템플스테이, 피정 같은 것들이 다 이런 증후가 아닐까요? 그리고 잘하는 사람들이 무얼 하면 못하는 사람들도 따라합니다. 과녁은 공유하지 못한 채 행위만 복사해 달음질치는 것으로 때로 산업 하나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딱 맞지 않지만, 영양제나 다이어트 같은?
전차에 이른 사람은 반드시 더 깊은 차원을 바랍니다. 그가 도달한 균형과 완성은 감각세계의 것입니다. 그는 더 나아가고 싶어합니다. 더 다른 것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요청될 뿐이면 그는 의지를 발휘해 마음을 접겠지만, 수량화할 수 없고, 그러므로 어떤 형태로도 양도하거나 탈취될 수 없는 마음의 직관이 어딘가로 조명하고 조망한다면, 그는 그 세계로 들어가려 합니다. 생활의식이 성취되고 나아갈 자리는 개인의 무의식입니다. 어쩌면 내 안에 깊이 있는 가장 낯선 타자인 나. 각 사람의 내밀한 장소, ‘자기만의 방’을 갈망하고 예감합니다. 자, 이제 다음 여덟 번째 메이저 아르카나부터 우리는 대낮의 거리를 지나 숲에 들어섭니다. 김지하 시인의 표현을 빌어 “예감에 가득 찬 숲그늘"이라고 불러도 좋을 경계에 들어설 것입니다. 차를 모는 손에 힘을 주십시오. 그러나 어깨는 굳지 않게 여유와 긴장을 함께 쓰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