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ll: A Tarot Story. 8과 11

힘의 시작과 끝

by 이제월

라이더 웨이트 타로에서는 메이저 아르카나 1번과 8번, 15번 세 장의 카드(The Magician, Strength, The Devil) 인물 위에 무한대 표시(∞)를 붙이고 있습니다. 이전의 클래식 타로에서 메이저의 여덟 번째 자리는 정의, Justice이고, 열한 번째 자리가 힘 카드였습니다. 그런데 황금새벽회는 이것을 ‘오류’라고 보았고,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대로 바로잡았으며, 웨이트 이후 대부분의 타로 카드는 이를 수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경우를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정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웨이트 이전의 시대에는 분명 의식의 세 층 중 두 번째 층에서 에너지를 발사하는 것, 에너지를 길어낼 수 있는 샘은 ‘힘'이 아니라 ‘정의’였다는 것이고, 현대에는 ‘정의’보다 ‘힘’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한 방에 뒤집어지는 전부 혹은 전무로서가 아니라 조금 가파르게 또는 답답하게 출렁이며 변해왔다고 봅니다. 길게 보면 데카르트에서 니체까지의 시간이 여기에 필요했고, 대중의 손에 실제로 잡히기까지는 예언적 선언의 반복이 반 세기쯤 계속되고 이차 대전을 마친 후라고도 생각합니다. 제가 ‘힘’ 카드에 담긴 아르카나와 ‘정의’ 카드에 담긴 아르카나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나누겠습니다.


#그땐 그랬지

메이저 아르카나 전체의 처음인 마법사 카드는 정말로 마법적입니다. 필요한 모든 원소(사대)가 다 들어 있고, 마법사는 당당하게 의지의 지팡이를 쳐들어, 자신이 뜻하는 대로 모든 걸 배열할 것을 과시합니다. 그는 존재로서 마법사이거나 행위로서 마법사로 인지됩니다. 전자가 마기, 후자가 매지션입니다. 전자는 자신이 행함으로써 그것이 마법이게 하고, 후자는 마법을 행함으로써 마법사가 됩니다. 둘은 닮았지만 다릅니다. 기독교 복음서에 등장하는 동방박사 또는 동방에서 오는 세 명의 왕이 바로 ‘마기’입니다. 그들의 행동이 마법이 되는 것은, 무언가를 실현하는 힘이 되는 것은 그들 자신이 멀리서도 ‘별’을 알아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별’을 멀리서 보기만 하는 대신 좇아가서 ‘별이 가리키는 아이’를 찾아 봅니다. 그들은 단지 모든 신비를 온전하게 찬미할 뿐,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 별의 아이가 뭇사람에게 알려질 수 있도록, 신비가 행하여지도록 몰래 피신하고 영영 자취를 감춥니다. 그런 게 마법사입니다. 다른 사람은 이렇게 완벽히 숨은 삶을 택하기 어렵기 때문에 수행을 통해서야 마법사가 되는 겁니다. 니체가 그랬죠, 인간에게 적극적인 능력은 망각이라고, 기억이 아니라.


오래 전 세계까지도 아닙니다. 우리처럼 스스로 근대의 과정을 밟지 못하고 주권을 강탈당하고 강제 점령을 겪은 이들은, 해방과 민주화조차 외세의 강한 간섭 아래서 겪어야 했던 처지에서는 그럼에도 개인의 탄생이 진행됐지만, 아무튼 순탄치만은 않았고, 부분부분 현재까지도 전체주의의 그늘이 남아 있습니다(검사동일체 같은?). 이태 전인가 이루어진 조사에서 교사들이 체벌을 하는 이유의 60% 이상이 어떤 교육적 목적 때문이 아니라 ‘질서 유지’였다고 하니 모두 똑같이 통제하려는, 소몰이하는 개 같은 성향은, 인간 사회에서 좀처럼 떨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우리의 선의가 얼마나 많이 얼마나 자주 다 똑같이 만들기 위해, 상대를 나에게 맞추기 위해 이루어지는지 생각하면 선의라고 생각하기 무안해지곤 합니다.


인류사의 대부분에서 죽을 운명은 개인이 져도 살아가는 것은 함께 하곤 했습니다. 공동체의 운명. 그리고 그것이 어떤 질서를 만들고, 질서에 복무하는 것은 생의 고유한 의무로 여겨졌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우리에게는 그런 것이 필요할 겁니다.


인류라는 집단의 역사가 아니라도 우리는 주변의 가치관, 이해관계를 공유합니다. 무엇을 혐오하거나 사랑하거나, 무엇을 자랑스러워하거나 부끄러워하거나 하는 것들에 보통이란 없습니다. 그 보통은 ‘나와 내 주변’인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식사 후 결코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건널목에서 얼른 시계를 보고는 후다닥 달려가 처음 보는 사람의 짐을 밀어 주고, 들어 줍니다. 아, 유아차나 큰 짐을 안고 거리에 나설 때 계단이나 건널목 앞에서 스스럼없이 도우려 다가서는 사람들을 떠올려 보면, 맹자의 기대처럼 ‘측은지심’을 보통사람의 보통 심성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안 그런 특별한 사람들은 좀, 무섭군요.

뭔가 ‘인류’라는 ‘집단의 경계’를 넓힐 것으로 기대되는, 그거 하겠다고 뛰어든 사람에게만, 예컨대 성자나 부처가 될 거다, 신에게 복무한다고 여겨진 사람들에게만, 천명을 이룬다, 대행한다고 여겨진 사람들에게만 ‘개인’이 되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출가’하거나 ‘성별’돼야 했던 거죠.


이 집단의 의사결정은 대개 선행돼 있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시대에 나고 자란 사람은 다 알고 있고, 다 느끼고, 생각하지 않다가도 왠지 그렇겠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압박을 느낍니다. 또는 그것은 편하고 다른 건 불편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이 의사결정 위에, 그것들의 결합을 전제 조건 삼아 나고 자랐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은 상상하기도 힘들고, 상상하더라도 불온하게 느껴집니다. 또는 발설했다가 제지받으면서 그것이 불온한 것, 내게 또는 모두에게 해를 끼칠 거라고 거꾸로 상상하게 되기도 합니다.

이 선행된 의사결정은 우리를 결코 ‘중립’이 아니게 둡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중립이고자 한다면 그것은 중립이 아니라 현재의 기조를 따르는 ‘정치적 보수성’을 띠는 것입니다. 질문하고 질문이 확신에 이르면 천명을 바꾸려 들 거고요. 그렇지 않으면 사람만 바꾸는 것 그 이상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막 이야기한 부정성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밑바닥부터 새로 시작하는 처지가 아닌 이상 우리가 받은 것들은, 우리를 아무튼 이렇게 살렸으니까 긍정성을 띱니다. 그것을 잘 배우고 나서야 우리는 할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나를 살려준 것들을 이해하고 긍정해야 나는 계속해서 살아갈 권리를 말할 수 있고, 그런 실력을 꿈꿀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확인한 빛과 그늘을 알아차리고 그대로 보는 것이 바로 긍정입니다. 이 긍정 위에서 부정할 것들을 걸러내야 할 것입니다.


그땐 그랬습니다.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그러나 이젠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라고 할까요? 웨이트 덱으로부터 타로는 일종의 선동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개인’이 된다고. 단순히 시민 ‘계급’이 아니라 모두가 자유로운 한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신성한 개인이라고 주장합니다. 자기 내면의 힘을 가지고 자기를 이해해야지, 외부에서 결정해 준 대로 자신을 규정하고, 이해하고, 이후 할 일들을 설계하지 말라고 이릅니다. ‘가문’을 생각하는 결혼이나 직업 선택, 국가나 종교, 계급만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시민, 코스모폴리탄, 인류 전체의 대표, 창조자로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의 입문자의 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외형을 따르다가 숙련되고, 어쩐지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더 큰 바람을 품게 되면 두 번째 단계에서는 자기 안의 힘을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안의 힘을 발견하고 마침내 그것을 쓰는 것은 실은 팔목/손목처럼 한 몸입니다. 근대 시민교육이 주어지자 중학생들이 일어나서 4∙19 의거를 일으켰습니다. 5∙18은 고등학생들이 전면에 나섰고, 6∙10에는 대학생들이 중심에 섰습니다. 물론 이때에는 이미 4월 혁명과 5월 혁명을 경험한 세대가 뒷받침했지요. 그런데 세대가 점점 뒤로 내려간 건 왜일까요? 교육이 누적되어 효과가 나타날 것 같은데 거꾸로 더 늦되었습니다. 그건 정보는 제공됐지만, 에너지가 제공되지 않아서일 겁니다. 처음에 새로운 에너지였던 것이 나중에는 그냥 그렇대, 하는 사실 정보가 되었고, 어느 만큼은 출세할 정보 심지어는 말은 그렇지, 하는 형식적 정보로 내려앉은 겁니다. 즉, 없는 사실을 배우면서는 그렇게 결정하려는 욕구가 생기고, 이미 상당 부분 현실이고 상식인 것을 배우는 건 ‘결정된’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를 살리기보다 자기를 억누르고 죽이게 합니다. 특히나 그 배움의 과정이 배움의 역동이 주도하는 대신 가르치는 쪽에서의 많은 정보와 기교로 생각할 틈 없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라면 더욱이나 그렇습니다.


자기 안의 힘을 발견하는 것은, 내게 주어진 신체적, 경제적, 심리적, 문화적 조건들에 의해 틀지워진 자신, 자신이 이제껏 살아온 성격, 기대, 재능 등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힘을 찾고 그것으로 결정해서, 선사받은 나를 다 소모해서라도 새로운 나를 스르로 만드는 일을 하는 첫 단추를 꿰는 것입니다. 그리고 발견 자체가 행위이고 실현하는 실천이며, 발견의 여정이 무궁하게 계속될수록 실현하는 우주도 무진합니다. 물론 실천하고 실현한 우주가 넓어질수록 우리의 발견은, 다시금 경계를 넓혀 ‘너머’를 꿈꾸고 건너다 보게 됩니다.


힘 카드가 나오면 주로 박수를 치고, 정의 카드가 나오면 근심하고 버거워하는 모습을 많이들 보입니다. 그렇지만 두 카드는 어쩌면 동일한 기능을 합니다. 다만, 예전에는 ‘국민총화’ ‘단결’ ‘국민총동원’ 같은 말에서 보이듯 개인의 결정권보다 전체의 단일한 결정이 힘을 발휘하고, 그래서 그편이 모두에게 대개는 더 나았던 것이고, 지금은 그것이 국가를 더 위태롭게 만들고 공동체를 차갑고 숭숭 구멍뚫린 상태로 놓아 두게 되며, 개개인이 선택하고, 이제 그것을 그대로 믿고 서로 지켜 주는 것이 공동체의 일원이 갖는 의무요 공동체의 존재 이유라는 게 드러난 시대, 여기까지 온, 현재인 것뿐입니다. 그리고 현재는 더 나아가려 할 겁니다. 그래서 개인의 내면에 깃든 힘을 이해하고 사용하게 하는 데서 비의를 발견하는 웨이트 타로의 비전은 그때 이미 벌써, 정의를 버리는 대신 자리 바꿈하여, 어떻게 보면 ‘힘’ 써서 다다를 더 성숙하고 발전한 지점에 놓아 둡니다. 다만 그것은 커다란 전환을 겪고 난 뒤여야 하며, 그 전환 후에는 그가 발견하는 의무가 <바가바드 기타>가 내내 노래하는 ‘달마’(다르마, Dharma, 業)로서 때로는 형제의 우의를 져버리거나, 불살행의 계율을 깨는 것을 정당화할 만큼 강력해지는 순간이 올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먼저 당신이 순수하게 당신 자신이어야 합니다. 발견하는 즉시 빠져나가 저만치 더 나아가 버릴지라도. 그러면 계속 잡으러 가십시오. 사랑하고 잡고, 잡고 사랑하고를 반복하십시오. 이상한 이유를 대며, 다른 사람과 세상에 들려 줄 이유를 찾아 구속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그저 사랑하십시오. 나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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