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ll: A Tarot Story. 9와 10

축과 날개

by 이제월




#8과 11 사이에는 9와 10이 있다

9는 7이 완성되기 전 6으로 한 번 만난 적 있는 그가 시험을 겪고, 그 성패나 당락을 떠나 이제 ‘마주친’ 과제가 아니라 ‘마주하는’ 과제를 들고, 맞닥뜨리고 만 게 아니라 스스로 마주하고 맞이한 걸 붙들고 나타난 것이다. 10은 8이 새로 시작한 뒤 9를 딛고 11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넘어서야 하는 관문이요, 운세가 바뀌는 회전문이다. 당신은 이 불투명한 회전문의 이편과 저편에서 전혀 다른 세상을 만날 수도 있다. 저쪽에 없는 줄을 알면서도 이쪽에서 미친 듯이 찾던 것을 놓고 건너가면 그새 저쪽에 찾던 것이 놓일 수도 있고, 이쪽에서 정신없이 달아나던 것을 피해 저쪽으로 가서 한숨을 놓는 순간, 내가 건너가는 회전과 전이로 두려운 그것이 저기서 나를 기다릴 수 있다. 모든 게 뒤죽박죽 바뀐다. 그러나 적당한 시간이 흐르고서 나를 축이나 통로로 삼은 전체를 살피면 그 일은 충분히 납득이 가는 변화이며, 마치 어릴 적 약속을 지키려 무료함을 참고 기다리듯 인내롭게 내게 일어나기만 기다리던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에는 무엇인지 알 수가 없고, 기왕 알던 세계와 기왕 경험해 본 일체의 심사에서 어긋날 수 있다. 그것은 미지의 것이고, 어쩌면 미증유의 사건인지 모른다. 배치가 바뀌었고, 규칙이 바뀌기 때문에 당신이 그것을 예측한다는 건 심지어 낭비이기도 하다.


#모두가 ‘개인을 통과’해야 한다

실존주의의 대표자로 꼽히는 철학자 키에르케고어는 자신의 저술 속에서 결국 한 사람 빠짐없이 모든 사람이 ‘개인을 통과’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 뒤에야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다고 하였다. 흔히 그는 ‘신 앞에 선 단독자’로 대표되는 고독과 우울의 기호로 소비되지만, 그는 절망과 싸우고 자신을 집어삼키는 감정과 상념, 무엇보다 냉정하게 고려한 온갖 가능성으로부터 용의자를 범인으로 확증하는 데 이르는 형사의 추적처럼 성실하고 인내롭게 사유하고 의지(意志)하였다. 그 사유는 답안지에 적도록 마련된 ‘단독자’라는 완성형이 아니라 다음 문제를 스스로 내고 풀 수 있도록 제시된 개방형의 ‘개인’이다. 그 개인은 최종형태가 아니고, 목적도 아니며, 마치 꼭 불러다 확인해야 할 유일 증인처럼 인간의 다음 단계를 위해 반드시 경유할 중간 기착지, 혹은 다음을 정하지 않은 막다른 골목이다. 그러나 골목 너머는 꽉 찬 건물이 아니라 무(無)의 평원이 펼쳐져 있다. 이 들판은 무한히 뻗어 있어서 다른 경로와 다른 삶의 양식을 제공할 것이다. 남이 완성한 걸 빌어 쓰기만 한 사람은 아무리 둘러보아도 사방이 공허하고, 어서 돌아서서 떠나갈 지독한 가난이 보이겠지만, 스스로 필요를 찾고 만들어 살아온 사람, 이제 네 벽을 나와 다른 길을 찾는 사람이 볼 때에는 무궁무진한 변화와 빚어낼 수 있는 극한의 미래가 펼쳐진다. 곧 상상이 현실을 넘어선다. 어떤 이에게 상상은 헛꿈이지만, 어떤 이에게 상상은 무엇이든 담는 그릇이고, 무엇이든 나르는 탈것이다.


#중심의 무게

뉴튼의 중력의 법칙, 이른바 ‘만유인력의 법칙’을 인류에게 제시했다. 무엇이든 있는 것은 무게를 가지고 끌어당긴다는 것인데, 정확하게는 끌어당기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이 서로를 향해 떨어져 내리고 있는 것이다. 중력이란 빛의 정반대, 자유의 반대인 구속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날아오를 수 없다. 그것은 셋째 층, 열다섯 번째 아르카나인 <악마> 이후의 세계다. 아직 무의식까지는 날 수 없고, 우리는 종속되거나 해체되는 길을 갈지 지배하거나 자존하는 길을 갈지 선택해야 한다. 내 무게가 고려되게 할 수 있는가? 나는 원심력에 의해 날려갈 것인가, 어떤 구심력을 일으켜 내 안에 핵을 품을 수 있을 것인가.

일련의 카드에서 우리는 낱낱의 상징에 집착하거나 그림 전체의 구도와 분위기에서 무언가 알아버리려 한다. 그렇게 모든 사태가 한 마디로 환원되고, 간단하게 정리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달리는 차, 걷는 사람에게 표지판은 수고를 덜어주고 활동을 종결시키는 대신 큰 수고를, 다만 가늠하며 나아가게 하고, 그 사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내내 깨어 있어야 할 거리를 상기시켜 줄 뿐이다. 다만 맞는지, 이 길이 어디인지 알면 그뿐이다. 특히 이 변화의 카드들에서 아르카나를 이해하는 길은 바퀴가 구르면 풍경도 바뀐다는 걸 상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나저러나 움직이는 수레의 차축은 꼼짝없이 제자리에 있다는 무극(無極)의 이치를 기억해야 한다. 변화하는 만물상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변화를 일으키는 웅대한 태극(太極)에도 휘둘려서 안 된다. 모든 것을 움직이고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는 고요한 중심, 무극에서 배울 일이다. 중심의 무게는 좁쌀 한 알보다 작아도 충분하다. 그것은 어쩌면 반짝하고 튀는 물방울처럼, 물방울과 빛의 부딪침처럼 찰나의 것이고, 있다고 해도 없다고 해도 좋을 무게일 것이다. 중요한 건 바로 그 점을 찾는 것이고, 그 점을 찍는 것이다. 점혈(點穴). 급소를 찍기. 사건의 중심축을 건드리기. 내가 아니라 사건을 보기. 내가 아니라 세상을 고려하기. 그러면 나는 지렛대를 든 사람처럼 원하는 대로 세상을 옮길 수 있다. 사건 안에서 사건 밖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이것이 객관화(客觀化)이다.


축이 돌려면 날개가 있어야 한다. 변화의 10, Ⅹ. The Wheel Of Fortune, 운명의 수레바퀴가 돌려면 적어도 두 날개가 필요하다. 날개가 돌면서 이것은 저것이 되고 저것은 이것이 된다. 부와 곤궁, 귀천이 바뀐다. 위아래가 변하고 우선순위, 사물의 경중도 달라진다. 운명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한쪽 날개는 탐구로 가득 찬 9번 은둔자이고, 다른 한쪽 날개는 11번 정의이다. 9번이 밀면 11번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목적인(目的因)처럼, 미래에서 잡아당기는 자석인 것처럼, 미래의 결과이면서 원인처럼 현재에 작용한다. 우리의 갈증은 그 채움을 위한 것이라는 말이다.


비록 내부에서 개인을 완성하려 하고, 개인을 극대화하려고 해도 그 개인은 낱낱이 떨어져 뿔뿔이 흩어지는 것이 아니다. 개인은 사회적 개인(a sociable individual)이며, 인드라망(Indra 網)처럼 어떤 구슬이건 다른 모든 구슬을 비추어 자신일 뿐, 분리된 별개의 자신은 없다. 그렇게 전체가 전체를 만들고 있으며, 고유한 진동들이 서로 균형점을 출렁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주 작은 무게. 중심에 대한 집중만이 필요하다. 이 고요함 외에 다른 수고로움은 거짓이다. 마음이야 진짜겠지만, 상상의 말처럼 탈 수도 없고 달릴 수도 없다, 아무런 실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찾고 찾고 또 찾으면, 우리가 찾는 것은 텅 빈 자신이다. 양파 껍질을 벗기면 껍질 속에 자신은 무엇인가. 이 텅 빈 중심을 찾아냄으로써 마침내 자신을 제어할 때 그 힘은 자기 것이 된다.


운명의 수레바퀴는 아주 단순하게 ‘너 자신이 되어라’라고 말하며, 그것은 극기복례(克己復禮)와 닮았다. 자신을 이겨 넘어서면 비로소 자신이 된다. 스토아 학파가 쾌락을 말하면서 결국은 어떤 동요도 없는 마음의 상태, 아파테이아(Apatheia)나 에피쿠로스 학파가 추구한 극락, 아타락시아(Ataraxia)나 똑같다.


스펠(spell). 마법을 거는 일은 말하는 것, 문자를 쓰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응당 한 점이 있다. 점을 찍을 것. 풍툼(punct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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