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ll: A Tarot Story. 12와 13

역전(逆轉)

by 이제월



#윤동주의 진복팔단

예수의 진복팔단은 주린 자는 배부를 것이고, 억압받던 이는 해방될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우물가에 서서 물 속을 들여다보고, 밤하늘 별을 헤던 사내는 대놓고 그 이름을 빌어 쓰되, 속 담긴 이야기는 싹 바꾸어버린다. 천하의 풍경이 바뀌어서다, 시절이 바뀌니 그런 것이다. 아니, 사람들의 독해력이 떨어지니 이쯤은 바꾸어 주어야 원작을 지킨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윤동주의 진복팔단은 지금 슬퍼하는 자가 복되다고, 저들이 더 슬플 것이라고 틈없이 여덟 번 반복한다. 여덟 개의 복은 하나가 되고 복의 원인과 결과과 뒤집어진다. 영에 엔트로피 법칙을 대입한다면 슬픔이 커진다는 것은 슬픔 아닌 어떤 것의 감소를 뜻해야만 한다. 출력값은 투입값을 넘어설 수 없으니까. 아주 조금이라도 결과는 원인보다 작아야 한다. 자, 그러니까 윤동주 시인이 바라보기에 슬픔은 열쇠 같은 거다. 그걸 써서만 열 수 있는 방이 있다. 그 집의 특성은 열쇠로 문을 열면, 열쇠 하나를 더 주는 모양이다. 그렇게 해서 한 발짝씩 전진할 수 있다. 마지막 열쇠는 장식이 될 것이다. 공간을 무한정 늘이지 않는다면 언젠가 마지막 방문을 열고, 그 방문을 여는 열쇠를 쓸 때 열쇠 하나를 새로 얻었으니(더 슬플 것), 마지막 열쇠는 달리 쓸 데가 없는 것이다. 아니면 단지 그만 가기로 하고 거기 서 있기로 하는 때에 당신 손에는 열쇠 하나가 남아 있을 것이다. 당신은 계속 갈 수도, 멈출 수도 있다. 슬픔은 당신에게 자유를 준다. 복은, 언제나 ‘다음’을 보는 것이다. ‘너머’를 확정하고 미지와 미답의 거기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시간이 있는 한, 시간의 세계에서 사는 한 우리는, 이것보다 거칠고 담대한 복을 상상할 수 없다. ‘다음이 있다’.

슬픔이 다음을 준다는 것이다.


#정의 다음

변화의 카드 <운명의 수레바퀴>는 탐구를 확신으로 바꾸어 준다. 예전에, 당신이 아이일 적에는 말 잘 듣고 반듯한 때에조차 자신이 하는 일이 무언지는 모른 채 하고 있었다. 그저 어른들이 하라니까 그러면 예쁨 받으니까 그리 했다. 그 상태의 당신은 칭찬받고 사랑받아도 점차 그게 아무렇지도 않고 답답하게 느껴진다. 당신은 잘하고 있으면서도, 그렇게만 해서는 그게 자기인지 가면인지, 내가 사는 건지 꼭두각시 춤을 추는 건지 알 수 없게 돼 버린다. 그래서 당신은 방황도 하고 반항도 할 수 있다. 겁 많거나 궁리가 많아 얌전히 지나갔을 수도 있지만, 알 것이다, 검은 화약으로 가득 찬 것 같은 불안한 심사를. 그러나 운명이 축을 굴리자 날개가 돌가 풍차의 각 칸이 새로운 사건을 날라다 준다. 당신은 어느새 아우들, 후배들, 자식이나 제자들에게 꼰대 소리를 듣고 있을 수 있다. 당신은 분명 시인이었는데, 어느 틈에 설교를 하고 있다. 당신의 이야기에 사람들이 열광하고 불지르고 뛰어다녔는데, 이제는 꾸벅꾸벅 졸거나 반항하는 눈빛을 감추느라 모자로 머리를 눌러 쓴다. 어떻게 된 일인가. 이건 바뀐 다음 게 잘 안 풀린 이야기고, 이게 잘 됐으면 사람들은 당신의 말을 구호로 삼고, 자세를 꼿꼿이 하고 당신 말을 경청하고 있을 것이다. 당신은 경험에서 우러난 진실함과 이상의 완전성에서 비롯하는 진실함을 모두 가지고 있을 것이다. 당신 자신이 하늘과 땅 사이 피뢰침이어서 사람들은 당신이라는 스펙타클을 목도하고, 당신이 지상에 이룩한 평화를 이 모든 사건 전후에 당신이 아무렇지 않고 한결같음을 바라볼 것이다. 열광은 그렇게 고요 속에서 온다. 정의 카드가 하는 일이 이것이다. 다만, 이건 아직 당신 머리속에서고, 바깥은 난장판이다. 당신이 질서를 이룰 때 세상은 늘 더 무질서하다. 당신이 질서를 찾아 떠나온 곳이 바로 그 세상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정신 차리고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기 시작하면 세상은 늘 당신을 허둥지둥 뒤쫓게 된다. 보고 생각하고 질문하고 바꾸는 건 세상이 아니라 당신이며, 당신 앞에서 세상은 발가벗겨지기 때문이다.


<정의> ‘다음'은 무엇인가. 정의가 오고 나서 정복자의 칼과 발굽은 없다. 그건 힘에서 직격하는 것이고, 당신이 그런 지름길을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겟다. 대신 당신은 <정의>가 주는 무궁무진한 미래 때문에 무한한 인내를 갖게 되고, 이 믿는 구석이 있어서든 눈 멀어서든(눈을 가려서라도 먼 척 할 수도 있고) 막무가내로 진실을 말하기 시작한다. 아니, 벌써 했다. 당신을 어떻게 말리겠는가. 당신은 주관적 세계에서 객관적 세계로 넘어가기에 다른 사람들은 당신이 의심스럽다. 가까운 친구들, 내가 기댈 그 어깨들이야말로 믿었던 데 비례해서 나를 더욱 이상하게 보고 ‘배신자’로 여긴다. 처음에 그들은 걱정하겠지만, 이내 자신들도 옮을까 걱정된다. 당신은 배덕자나 배교자의 패를 쓰고 거꾸로 매달릴 것이다. 어제의 친구들이 오늘은 나를 조롱한다. 점잖은 문명사회에서 교양있게 잔을 나누더라도 당신은 저들의 눈빛이 달라지고 심사가 뒤집힌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런 때 알아보고 당신 편에 선 사람은 의리 있는 게 아니라 똑똑한 거다. 변화가 오면, 같은 변화가 더 크게 반복되기를 반복할 것이다. 물이 빠지는 걸 보고 너른 모래밭을 뛰어다니는 대신 큰 물이 들 줄 알고 급히 달아나는 사람이다. 그런 건 안 배운 채로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산다. 그다음 지진해일이 덮친다. 전에 바다가 아니던 데까지 바다가 삼킨다. 그러나 당신은 높이 달렸기에, 꽁꽁 묶였기에 평온하게 미소 짓고 있고, 당신 편에 선 사람은 덩달아 살았을 확률이 높다. 그럼, 그 다음은?


# <매달린 사람> 다음

이렇게 살았으니까 사람들이 당신을 인정하고 추켜세울까? 천만의 말씀. 이번에 그들은 분을 못이겨 당신을 끌어내리고 죽이고 만다. 다른 그림에서는 당신이 열받아서 흑화해 다 베어 버린다. 사신과 빨리 장기 두러 가거나, 사신이 되어 낫을 휘두르거나.

<죽음> 아르카나의 그림은 자주 해골이 등장하고 낫이 등장한다. 그러나 오래전 이 그림은 그리스 신화의 크로노스를 가리키던 것이다. 크로노스는 연대기를 나타내는 단어(chronicle)에도 흔적이 남아 있는데, 차곡차곡 쌓이는 시간을 나타낸다. 그리고 시간은 낫을 든 것으로 묘사되곤 하였는데, 이는 시간이 부자나 빈자, 성자와 악인을 가리지 않고 모두 데려간다는 것을 뜻한다. 추수 때가 되어 낫을 휘두르듯 가을걷이하듯 산 자는 모두 죽음의 차지가 된다. 그리하여 마르세유 덱이 나오던 19세기 초에도 낫을 휘두르는 크로노스는 불길한 조짐이 아니라, 불평등한 세상에서 마침내, 비로소, 드디어 해방되는 것, 이것만은 공평한 그 일을 맞이하고 모든 짐을 벗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행복한 은퇴. 고생 끝, 휴식 시작~, 하는 느낌도 주었다. 마르세유 덱에서는 바보 카드에 번호를 매기지 않은 것처럼 이번에는 이 카드에 이름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열세 번째 메이저 아르카나는 무명(無名, no name) 카드로 불리었다. 현대의 덱 중에 몇몇은 <Death> 대신에 <Rebirth>라거나 <Time> 같은 이름을 부여하고 있기도 하다.

영화나 드라마, 만화책 같은 데서 타로가 등장하면 <죽음>이며 <무너지는 탑>이 등장하고, <죽음> 카드는 정말로 누군가 죽을 것을 예고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 때문에 이 카드를 뽑는 사람은 께름칙한 마음이 들기 쉬운데, 앞서 말한 것처럼 죽음은 물질이 풍족한 요즘에는 확실히 꺼리는 일이 된 것 같지만, 오래도록 찬양받아왔고, 사람들이 고대하고 반기는 사건이기도 하다. 그리고 죽음 카드 대신에 ‘재생’이 테마다 되기도 한 것처럼, 이는 필멸할 것이 멸하고, 다른 주기가 시작된다는 것, 살아서는 못 바꿀 것들을 바꾸어 완전히 새로 한다는 암시가 들어 있다. 그래서 한쪽에서 죽음이, 다른 한쪽에서는 태어남일 수 있다. 마가렛 페터슨 덱은 이 장면을 카드 화면을 대각선으로 나누고 한쪽에는 앉은 채 죽은 이를, 다른 한쪽에는 거울에 비친 상처럼 뒤집어서 앉아 있는 산 사람을 그려 대비시키고 한 자리에 담아 그 의미를 통합하고 있다.


슬퍼하는 자 복되어 더 슬퍼할 거라더니, 점입가경(漸入佳境), 갈수록 꼴이 멋지다. 정의가 인내를 낳고, 인내가 죽음을 낳았다. 축하할 일이다. 이제 당신이 무엇이든 전과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은 이렇게 자유를 얻었다. 만일 이것이 앉아서 듣는 ‘남 이야기’가 아니라 당신이 직접 경험하는 ‘내 이야기’라면 어떨까? 당신이 상상하기에 여기까지 겪은 다음 당신은 다음 장면이 어떠하리라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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