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개의 돌과 공자, 소크라테스
세 개의 돌은 존재-함을 해석하는 일반 틀을 만드는 내 관찰과 사고의 여정에서 출현했다. 간략히 말하면,
성자의 돌은 위치를 부여하고, 현자의 돌은 능력을 부여하고, 시인의 돌은 태도를 결정한다. 이로써 개성(個性)이 발생한다.
1. 동서 철학의 비조로 공자와 소크라테스를 삼을 때, 이들이 심은 성자의 돌은 동서 철학의 성격 차이를 연역적으로 설명해 준다.
2.0. 소크라테스는 ‘앎’을 중요시했고, 철학이란 제대로 아는 것이요, 제대로 알면 아는 대로 행한다고 하였다. 이때 학문의 분화가 일어나기 전이므로 철학은 학문이라고 고스란히 바꾸어 써도 될 것이다.
2.1. 앎은 완전성에 의해 그 가치를 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완전성을 추구하는 철학이 된다. 소크라테스가 발견한 성자의 돌은 완전성이다.
2.2. 플라톤은 보통사람과 더불어 세계의 불완전성을 인식하기에 척도가 되는 완전한 세계, 이데아를 발설했다. 플라톤이 발견한 현자의 돌, 그가 ‘놓은’ 권능이자 조건, 완전성을 물화한 것이 이데아다.
2.2.1. 이데아를 설정하면 나머지는 그림자다.
2.3. 아리스토텔레스는 보통사람과 더불어 세계의 생생함을 인식하기에 이데아보다 이 아래세계를 기준으로 삼는다.
2.3.1. 여전히 완전성을 추구하지만 이제 인간정신은 항상 완전성으로부터 외면받는다.
2.3.2.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른 현자의 돌을 마련한 게 아니다. 플라톤이 놓은 돌을 거꾸로 사용해 본 것이다. 플라톤에 대한 각주라는 평가는 그래서 억울하지 않다. 그렇다고 이 각주가 무가치한 것은 아니며, 본문의 불완전성을 완벽하게 보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2.4. 이후의 모두는 자기의 태도를 정했을 뿐이다. 소크라테스 아래 학문하는 이들 가운데 플라톤과 다른 현자의 돌을 놓은 이는 아직 본 적이 없다.
3.0. 공자에게도 앎은 중요했지만, 그를 대표하는 ‘인仁’이라는 말은 앎, 지知보다는 함, 행行에 초점을 둔다. 이 ‘행’은 후대 불교 사상이 유입되며 오온五蘊(色受想行識) 중 하나를 ‘행’으로 말한 것처럼 어떤 것이 실제로 존재함, 세계 안에 작용하고 있음을 직접 가리키는 말이다. 행에는 능동적 행위뿐 아니라 관찰될 수 있음을 강제하는 있음 자체, 살아있음, 존재-가-존재-를-이행함이 직접 지시된다.
3.1. 공자가 뿌린 학문-함의 핵심은 행위자와 행위의 관계, 존재와 작용의 관계로서 그 진실함의 정도가 가치를 정하게 된다. 따라서 공자 철학은 온전함을 추구하는 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온전함이 그가 찾은 성자의 돌이다.
3.2. 소크라테스 뒤에 플라톤이라는 해석과 아리스토텔레스라는 댓글이 따라붙은 것처럼, 공자 뒤에도 인물이 따라붙는데, 완전성에 대한 두 인식과 마찬가지로 온전함에 대한 두 인식을 보여 준다. 공자의 인에 붙여 맹자와 순자는 동일한 현자의 돌, 인성을 제시한다. 인성에 따라, 인성이 나머지 사태를 바꾸는 스위치다.
3.3. 맹자는 보통사람과 더불어 사람의 본성에 깃든 인의 실마리를 보았고, 사단四端을 말하였다.
3.3.1. 사단이 본성 안에 있다면 행위자는 선하며, 함은 당연하고 하지-않음과 잘못-함은 악이요 결여다. 선은 그 내용을 갖고, 내용의 충족 또는 변형으로 온전함의 정도를 측정하게 된다.
3.4. 순자는 성악설을 통해 함이 자동으로 나오지 않고 시스템의 작용에 대한 반응으로서 발생하고 모방하여 형성한다고 보았다.
3.4.1. 선이 선한 세계와의 접촉에서 생겨난다고 할 때, 그 접촉 없이 홀로는 저절로 선하다고 단정할 수 없고 도리어 쉽게 악하다고 할 때, 악하다는 건 ‘상대’를 고려하지 않는 것이고, ‘너’를 호출해 너와의 ‘관계’를 고민하고 해결하는 것이 선이 된다. 선은 내용보다 형식으로서 규정된다.
4.1. 소크라테스의 길에서 철학이란 완전성을 추구하고 영원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철학은 세계를 설명하든지, 설명할 수 없어 자신을 의심하든지 믿음과 의심 양갈래 길을 걷는다.
4.2. 공자의 길에서 철학은 온전함을 추구하고 끊임없이 현실 구현을 추구한다. 철학은 세계를 구성하거나 구성하지 못해 실패를 인정하는 인정과 부인의 양갈래 길을 걷는다.
4.3. 그러나 왜 둘인가, 둘은 서로를 배척하는가? 혹은 둘을 선택하는 다른 상위의 것이 있는가? 그것은 우리 안에 있나, 우리 밖에 있나, 그것은 우리와 함께 하는가, 우리를 배제하는가? 밖에 있고, 배제하는 경우 그것은 우리에게 간섭하는가, 우리가 그것에 간섭해야 하는가, 간섭이 어떤 의미를 띠거나, 의미를 띨 때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있든지 그럼으로써 달라지는 게 있는가.
5.0. 처음 이야기한 소크라테스 및 소크라테스들 그리고 공자 및 공자 무리에 한정해 본다. 이때에도 그들이 그들 자신을 무어라고 주장하는가는 알아두면 좋지만 본질은 아니다. 그들이 무엇을 알았고 무엇을 했건, 그렇게 쓰고 그렇게 말하여 그렇게 전해지면, 이제 그 이름은 그 전해진-것, 유산을 대표한다.
5.1. 나는 거듭 생각하며 지금 위와 같이 생각한다.
5.2. 나는 거듭 생각하여 시간 속에서 달리 생각할 수 있다.
5.3. 그러나 지금 삶이 중단되거나, 다르지 않게 지속한다면, 내 의지가 그러고자 하기에 더욱, 지금 이렇게 알고 이렇게 생각한다고 말하여야 한다. 그럼으로써 뒤따르는 자랑과 부끄러움이 모두 정당하게 내 몫이 된다.
6.0.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애초에 그들 중 누구도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말함으로써 해석했다. 그들이 말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 해석이다. 해석-읽기로 사실-쓰여진 것에 맞섰다. 둘의 관계로 인간의 삶이 구성되고 강한 동력을 얻었다.
6.1. 둘 다 또는 둘 아래 펼쳐진 무한급수의 견해들에 대하여 진정을 다해 감사한다.
6.2. 감사의 행위로 견해들은 시비의 대상이 되기보다 선택과 사용, 이를 통한 검증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간디가 진리가 증명할 거리가 아니라 쓸 거리라며, 진리는 증명하지 않고 사용하면 된다고 한 말에 동의한다.
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