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밍 이펙트 또는 거울로서의 나그네쥐
레밍(Lemming). 한국어로 ‘나그네쥐’의 집단 자살은 신화에 가깝다.
그것은 자살이라기보다 근시, 고통, 고속 폭주 들이 결합돼서 우르르 추락하여 익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벼랑 앞에서 멈추려 해도 뒤이어 오는 이들에 밀려 줄줄이 낭떠러지 아래 바다로 떨어지고 만다.
‘그들은 모두 살고 싶어했으나, 살 수 없었다’
라는 것이 정확한 진술이다.
외부자가 보기에 자살처럼 보이는 그들의 죽음을 향한 질주는 수년마다 되풀이되며,
겉보이는 다른 원인이 없어 주기적으로 집단으로 자살하여 개체수를 보존한다는 생각이 나올 만하다.
그러나 원인 분석과 현상의 해석에 여러 오해가 있었다 해도
이 주기적 떼죽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먹이에 알맞은 적정 개체수를 회복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 뒤에 어떤 섭리가 있다고 믿든지, 혹은 자연히 발생한 균형이며, 거기에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보다
균형을 맞추는 데 실패한 종이 사라졌으므로 남은 종들은 이런 자연의 평형 상태에 도달했다,
매순간은 아니라도 주기적으로 이런 동적 균형이 만들어져 왔다라고 생각하든지.
인간에 관해서도 비슷한 이론이 있다. 남녀의 자연성비보다 남아 출생이 좀더 높아지면
그들이 성년이 되는 즈음에는 반드시 대규모 전쟁이 벌어진다는.
두 통계 사이에는 긴밀한 연결이 발견돼 이 동시성이 연구되어야 하지만
인과관계가 명확히 밝혀진 것은 아니고, 깔끔하게 결론 내릴 만한 특별한 방법도 당분간 없어 보인다.
레밍과 인간의 이 기묘한 종 차원의 균형과 관련해서 거의 말하여지지 않는 것이 한 가지 있다.
이 대이동, 대격돌, 전쟁의 결과가 죽음이거니와 그 죽음이 모두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 그렇다면 누가 죽고 누가 살아남는가 하는 문제 말이다.
나그네쥐의 집단 질주가 멈출 때,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는 미리 딱 선을 그을 수는 없다. 사태가 종료된 후에도 그렇게 선 긋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다. 전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 세계, 그 집단의 중심에 있는 이들은 모든 방향의 위험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주변부에 있는 이들은 가장 가깝거나 가장 멀게 위치한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재앙은 가장 가깝거나 가장 무관하다. 그래서 그들을 선형으로 분석하면 이들의 상태와 이 전체 사건의 판도를 올바르게 읽지 못한다.
그러나 확장하는 면으로 관찰하면 중심은 안전하고 주변은 복불복, 기본적으로 불안전하다.
문명이란 무얼까, 개체가 헌신하고 노역할 만한 집단, 공동체란 무엇인가. 그 공동체의 가치는 무엇이며, 어떠해야 동의할 수 있고, 의미를 가질까?
중심의 안전이 주변에 더 미칠 때, 더 멀리 주변까지 확장돼서 주변의 소멸, 일시적이건 주기적이건 그럴 희망을 정초할 때, 그때에 그것을 문명,이라고 불러야 타당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면 한가운데서 모든 소용돌이의 중심에서 흔들리지 않고 있는 중심이 아닌 한, 나는, 당신은, 우리는.
이의를 제기하고 저항해야 하지 않는가?
함께 살자. 이것이 문명의 식별기준이다. 중심의 안전이 주변에 미치는 것. 중심이 함부로 움직여 주변을 생사 실험으로 내몰지 않을 것 혹은 못할 것.
우리는 지금 어떤 세상을 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