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ll: A Tarot Story. 20

부제: 심판받은 세계 그리고 끝과 시작(1)

by 이제월



#심판, 그 낯설고 두려운

타로 카드를 처음 접하는 사람이건 몇 차례 접하는 사람이건 메이저 아르카나 가운데 꺼리는 카드가 몇 개 있습니다. 흔히 죽음 ― 마르세유 덱에서는 ‘무명(無名)’ ― 카드에 그런 반응이 흔하고, 악마 카드에 대해서도 그런 반응들이 있습니다. 이 덱들은 나중에 타로를 알게 되면서 그 거부감과 당혹스러움이 줄어듭니다. 죽음은 새로운 탄생과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고, 인생을 새출발하게 해 줄 수 있기 때문에 반기기도 합니다. 융 심리학에 기초한 꿈 작업을 하는 이들은 함께 공부하고 작업하는 동료 가운데 죽는 꿈을 꾸었단 소식을 들으면 비행기를 타고서라도 달려와 모여서 축하해 준다고도 합니다. 악마 카드 또한 선악에서 악을 담당한다기보다 선 일변도가 아니라 세상에 깃든 이원성(二元性)을 나타내는 카드로서 이 세계의 자연스러운 모습일 뿐 아니라 자주 영리하고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도 하니까요. 그렇지만 심판 아르카나 품고 있는 비의(秘義)를 듣고 나면 처음보다 더 당황하고 꺼리는 반응을 자주 접합니다. 그럼 대체 왜 그런 걸까요?


#심판의 다른 말은 식별

타로 카드의 메이저 아르카나가 삶의 여러 신비를 밝힐 때, 그것이 반드시 단일한 수용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저쪽에서 양의 부호가 와도 내가 음의 부호이면 둘이 마주쳐 이루는 곱은 음의 결과를 내고, 거꾸로 저쪽에서 음의 부호가 온다면 마치 양인 것처럼 수용할 것입니다. 내가 건강한 상태, 오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상태에서만 저것이 지닌 본모습이 드러납니다. 제대로 보이고, 제대로 듣고, 그제야 제 맛이 납니다.

만물이 하나일 때, 내 인식의 세계에 내가 전부인 동안, 내가 곧 정의입니다. 여기에는 윤리나 도덕도 없고 선도 악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정의는, 아기의 정의는 마법입니다. 마법적 사고는 그가 무엇이든 흡수하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기초합니다. 그러다가 둘의 세계, 나-와-너가 있는 세계에서는 나도 나이고, 저이도 저이 자신에게는 나이기에, 두 개의 절대는 서로를 상대적으로 만듭니다. 둘이 어느 한쪽을 부정하지 않으려면 양보하는 경계석이 필요합니다. 이 경계 세우는 것이 정의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이럴 순 없습니다. 이 객관적 경계는 종전이 아니라 휴전, 임시 약속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정의는 양자 사이, 스스로도 그 만남도 천변만화하는 다자의 관계성 안에서 요동치고 그것이 과연 다수거나 강자의 논리인 건지, 정말로 참인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 이제 식별이 필요합니다. 이 식별은 절대의 선언이고, 하여 그것은 심판입니다.

크리스트교는 이 심판을 최후로 미룹니다. 적어도 인간과 인간이 만든 어떤 것도 심판하지 않도록 합니다. 구약의 시대 현세적 부와 성공이 곧 올바름의 표징으로 받아들여지던 상태에서 현상계와 예지계를 강하게 떼어 놓고 둘이 다르며, 전자는 죽은 자의 것이요, 후자는 산 자의 것, 곧 영원히 살아계신 하느님의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형제를 판단한다면 바로 하느님의 것을 빼앗는 죄, 독성의 죄를 범한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이대로는 견딜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식별의 기준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곧 회중(會衆)입니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시대인 1세기 지중해 세계의 국제어는 대중 희랍어 즉, 코이네였습니다. 코이네에서 회중은 에끌레시아(ecclessia). 이 말이 나중에 ‘교회’를 가리키는 말로 정착하지만 에끌레시아는, 적어도 예수의 말을 듣던 이들, 그의 직제자인 사도들의 말을 듣던 이들에게는 보통명사로서 ‘연결된 무리’, 회중을 뜻했습니다. 아마도 예수 자신의 말이기보다 복음서가 쓰여질 때 첨가한 것으로 성경 연구자들이 보고 있는, “너희가 땅에서 매어 두면 하늘에도 매어 있을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려 있을 것이다”라는 지침은 회중을 식별의 주체로 보고 있습니다. 각자가 행위의 주체로서는 행세할지 몰라도 식별의 주체는 개인이 아닌 공동체라는 것. 그럼으로써 최후 심판은 ‘이미’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적 처형은 불가하고 모든 처형, 나아가 모든 강제력은 공동체(근대에는 국가)로 귀속되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자유입니다. 그럼으로써 한 사람 한 사람은 오직 서로에게 자유를 줄 수 있습니다,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는 시비를 가립니다.

심판은 이 식별을 뜻합니다. 세 번째 정의. 내가 좋아한다, 너도 나도 좋다고 인정한다를 넘어서서, 지금 이 자리의 모두가 마뜩찮아 할지라도 그것은 ‘옳기에 옳다’는 판단. 아니, 결정.


#식별의 이유

심판은 왜 하는 것입니까? 심판은 ‘살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심판이라는 말에서 떠올리는 ‘죽임’의 냄새를 지우고 거기에 ‘살림’의 온기와 활기를 불어넣는 것은 심판할 줄 모르고, 심판할 수 없는 무자격의 상태에서 전초 오류의 광막한 사막을 건너감, 그 파스카에 있습니다. 그 건너감은 고통과 죽음과 다시 살아남을 품고 있고,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채 죽지 않고 소생하는 걸 뜻하지 않습니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질문을 덮어 두고, 그것의 은유를 문학적으로라도, 정신적으로라도 읽는다면 그것은 곧 자동 승천은 없다, 신들은 그런지 몰라도 우리 인간은 그렇지 않다, 사람은, 사람의 아들은 고통받고 죽고서야, 아주 죽고서야 다시 살고, 다시 살았다면 이제 높이 오를 것이다,라는 독서가 가능합니다.

심판자는 스스로 부당한 심판을 견딘 자들입니다. 하나의 문명이 이런 사람 하나를, 오직 한 사람이라도 품고 있으면 이어지고, 그 한 사람을 지니지 못하면 맥이 끊겨 소멸합니다. 살아가는 대신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식별의 이유로부터 식별의 정의(定義)가 갱신됩니다, 새롭혀집니다.


#식별은 환대다

식별은 환대입니다. 그러나 이 환영은 기대한 것이 아니고, 기대한 것과 다르고, 기대하지 못한 것일 공산이 큽니다. 이것은 일종의 공식입니다. 우리가 겪는 변화, 심판으로써 우리에게 내리워지는 것은 단순한 판단이 아니라 식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환대하는 것은 비로소 올바름, 참입니다. ‘진리는 자명한 것’입니다. 달리 증명할 수 없고, 간디의 말처럼, 당신은 그것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증명할 방법은 없습니다. 진리가 나머지를 증명하는 근거이지, 다른 근거를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자명한 것을 여기저기 쓰십시오.

식별, 심판은 극한으로 무거운 것이지만, 무한히 가볍습니다. 당신은 심판받음으로써 멍에를 벗습니다.


아직도 심판이 두렵습니까? 심판은 그저 정의롭게 내려질 것이며, 그것은 승자에게도 패자에게도, 정의롭던 사람에게도 불의했던 당신 또는 나에게도 축복입니다. 그림자만 보던 우리에게 색깔이, 형체가, 깊이와 너비가 주름지고 또 펼쳐집니다. 나비의 날갯짓 같은 세상을 새로 만납니다. 이 다시 만난 세상은 전과 같지 않습니다. 심판은 우리의 상상이 사실 앞에 서는 것입니다. 사실, 팍툼(factum)은 ‘만들어진 것’을 뜻합니다. 이 공작자(工作者)가 누구겠습니까? 모릅니다. 다만 옛 로마사람들이 하필이면 모든 ‘사실’(영어의 fact는 라틴어 factum을 어원으로 합니다)을 뜻하는 말을 이렇게 만들었다는 데서, 헬라사람들이 퓌지스(그냥 그대로인 것, 저절로 있는 것, 자연을 가리킨 말)라고 쓴 것을 굳이 옮겨 ‘낳아진 것’ 곧, ‘나투라(natura)’나 아니면 ‘팍툼’이라고 한 것은 좋은 일도 괴로운 일도, 바라던 일도 바라지 않는 일도 미처 깨어나지 못해 모를 뿐, 다 좋은 일, 신이 만들지 않고서야 그럴 리 없는 완전한 것이라고 여겼던 것임을, 그리하여 모든 사실은 상상을 초과하고 있고, 만물이 땅에 뿌리 내린 것처럼 무한한 자유, 신성의 의지에 뿌리 내린다고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어떤 덱들은 ‘심판’ 카드를 숙고하여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재생, 재탄생(renewal, rebirth)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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