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블유는 '신화 다음'을 보여 준다
검블유에 관한 한 진술
―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는 현대의 신화 혹은 ‘신화 다음'을 보여 준다
2019년 6월 5일 첫 방송하여 2019년 7월 25일까지 16부 방송한 tvN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는 인터넷 포털 업계 1,2위인 유니콘과 바로의 여성들을 중심에 두고 일과 사랑에 관해서가 아니라, 일이든 사랑이든 살아가는 방식에 관해 보여 주고 있다. 그렇지만 남성 출연자도 많고 그들도 단순히 소모되진 않는다. 남성중심 서사에서 여성들이 소모품으로 쓰이고 사라지는 데 비하여 더 양성평등적이다라기보다는 이것이 여성적 서사의 한 전형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한 명 또는 한 집단을 중심으로 나머지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야기에 들어서는 모든 인물이 설명되고, 조명되고, 나서는 것도 납득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좋은 이야기이고, ‘이야기답다’고 느껴진다.
액션 영화를 볼 때 촘촘한 드라마를 기대하지 않고, 판타지를 볼 때 역사 법칙을 기대하지 않듯이 장르란 이야기의 기본 틀거리로서, 어떤 것이 하나의 장르로 기능하고 발견되면 독자는, 시청자는 그 이야기의 무엇을 기대하고 수용하며 또 무엇을 거부하거나 경시한다.
신화는 본질적 해명(기원신화. 창조신화나 특정한 무엇의 기원 및 원인에 관한 신화)이나 본질적 성장(자아의 신화. 영웅담)을 담고 설득해 낸다면 다른 요소들은 아무리 말이 안 되는 것 같아도 상관이 없다. 모든 이야기 가운데 가장 자유로운 이야기 갈래 아니, 이야기 자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시대정신에 따라 다르게 읽히고, 다르게 읽히도록 요청받았다. 오늘날 그리스신화는 대부분 정신분석학으로 설명받도록 대기하는 심리학적 원형(原型, Archetpye)으로서 비로소 이물감 없이 독자에게 수용된다. 그렇지만 신화는 또한 과학적 사실에 대한 은유로도 읽힌다. 독자의 소양에 따라 같은 이야기가 다르게 수용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동화나 옛이야기가 민족주의나 여성주의, 사회주의 이상에 따라 비판받거나 재조명되기도 한다. 이렇게 많은 자유를 잃었지만, 말하여짐에 있어서 신화는 무척 자유도가 높다고 하겠다. 이후 나타난 여러 문학갈래(Genre) 중 신화의 자유도에 가장 가까운 건 아마도 판타지(Fantasy) 장르일 것이다. 판타지는 문학작품 속에나 일상 대화 속에서 일정 부분 섞여 있곤 하였으나 주로 톨킨의 작품 『반지의 제왕』 이후 독립된 장르로서 자리 잡게 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 판타지는 시작부터 끝까지 판타지여서 오히려 쉽다(사실은 어렵다).
정말 흔한 판타지는 현대의 텔레비전 드라마가 그리는 현대극 속에 나타난다. 일상이 여러 가지로 비틀리며 현실인 척하지만 아니란 걸 모두가 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일개 드라마에서 신화를 떠올리지 않는다. 가끔씩 단일 작품으로 완결된 채 선보이는 영화에서 그런 작품을 만나기도 하고, 그럴 때면 관객과 평론가 들은 작품을 통해 연상되는 무수한 신화를 언급하며 젠체하기도 하고 작품에 대한 평가를 달리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 ‘내용’으로서 어떤 신화를 모방하는 대신 신화라는 ‘이야기’의 본질을 탐구하여 신화만큼의 자유를 획득한 작품이 있다. 그렇게 읽어내는 사람이 보이지 않지만 누군가는 그렇게 읽어냈을지 모른다. 나는 그렇게 읽는다.
신화의 인물은 성장하기도 하지만 각자가 신성과 인성을 두루 품고 드러낸다. 그런 면에서 그들 안에는 변화하는 부분과 결코 변하지 않는 부분이 공존한다. 신성은 변하지 않고 끊임없이 인성을 끌어당겨 더 완전하게 변화하도록 이끈다. 인물 안에 있는 이상과 현실일 수도 있다. 그런데 만일 현실이 전부라면?
현실이 전부인 세계에서, 다시 말해 신화를 추방한 세계에서도 신화는 가능한가? 영웅이, 성장이 가능할까? <검블유>는 거기에 대해 한 가지 대답하고 있다.
검블유 속 인물들은 한결같다. 어쩌면 그렇게 시작부터 끝까지 똑같은지 모른다. 그것은 작가와 연출자, 배우 들이 공모한 설계다. 누가 봐도 보이지만 굳이 마지막회의 대사에서까지 직접 되풀이한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고.
그러나 바뀌지 않는다는 것은 통상 죽음을 보여 왔다. 살아 있다면 변하고, 변하는 것이 살아있음의 증거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어떤 것이 살아있고 바뀌지 않는다. 살아있고 바뀌지 않는다는 건 무슨 뜻인가, 그것이 신성에 해당한다는 것, 불변의 속성이라는 것, 이미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검블유>는 주조연을 막론하고 여러 인물들이 변치 않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변치 않는 그 인물들이 무엇을 바꾸어내는지, 어떻게 세상을 바꾸어내는지 함께 보여준다. 그들이 보여주는 자아의 신화는 개별자들이 아니라 전체세계가 주인공이다. 성장의 주체는 세계다. 인물들은 불완전하여 자기를 뜯어 고쳐 완전하게 되어야 할 존재가 아니다. 인물들은 자기를 한없이 쇄신, 갱신하면서 더욱 단단하게 자기 자신이다. 그들에게 자기 자신은 바깥에 있거나 먼 미래에 있지 않다. 그들은 이미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느끼고, 실행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하한 이유로도 흔들리지 않고 그대로 자기실행을 계속하면 그들은 신성하다.
현실에 ‘다른’ 이상을 끌어들여 현실로 하여금 꿈꾸게 하는 드라마는 많았지만, 현실 그대로를 이상으로 바라보게 하는 드라마는 희귀하다. 이렇게 유행에 대한 감각을 견지하면서 고전적이고 고지식한 작품은 쉽게 만날 수 없다.
현실이 그대로이면 판타지가 된다.
신화를 잃어 버린, 그리하여 ‘공동의 꿈’을 박탈당한 시대에 <검블유>는 낯설고 새로운 신화를 전한다. 너는 그대로 너이어라. 네가 너인 만큼 세상은 바뀐다. 우리는 이제 완벽한 철인, 초인을 찾지 않는다. 적어도 이 한 장의 초대장은 초인 대신 보통사람, 그러나 실제에서 만나기 힘든 ‘끝내 자기인 사람’을 호출한다. 이 세계에 기원은 사라졌다. 그건 필요치 않다. 기원은 이미 우리 안에 있으니까. 그리고 자아 또한 힘겹게 멀리 떠나 용을 무찌르는 모험을 요구하지 않는다. 자아를 찾는 신화는 기원이 숨겨진 자기 안으로 들어가, 자기가 선 일상을 치열하게 사는 데서만 구해진다. 그러면서도 그대의 역할과 그대를 향하는 요구들이 그대를 사라지지 않게 할까?
살아(남아)라? 괄호는 빼자.
살아라!
그대를 살려라.
그러면 그대와 그대 같은 여럿이 어울려 세상은 바뀐다. 그게 최선일지 모르지만, 그 세상은 적어도 우리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