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게 되)는 것들 (22)

“김지은입니다”를 읽고

by 이제월



“김지은입니다”를 읽고

편재의 사슬을 끊으라고 요청한다


영화 <노팅힐>은 헤어진 연인이 세상 곳곳에 편재하여 발생하는 낭만적 고통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그 괴로움은 달달하기조차 하여 사람들은 주인공들에게 안타깝게 공감하는 한편 기꺼이 이입하여 어쩌면 그가 나라면 어땠을까 자리 바꾸기를 상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개 그들을 응원하고 행복한 결말을 같이 꿈꾼다.

여기 전혀 다른 방식의 편재가 있다. 이 편재는 괴로울 뿐 달콤함이 스밀 틈이 없다. 주인공은 피해를 의심받고 시험받으며 사법적 최고 판단도 사람들의 확신과 의심을 거두지 않는다. 마침내 피해를 사실로 인정한 사람들조차 더러 제가 뿌린 씨앗 제가 거둔 거다, 그럴 만했다, 원하는 걸 얻고 대가는 치르지 않으려던 거 아니냐, 가해자가 많은 훌륭함을 갖췄는데 허물이 있다고 그 앞길을 막다니 독하고 이기적인 또라이, 엮이면 피곤할, 피해야 할 더러운 자로 호명되고 기억된다. 가해자는 이상한 방식으로 편재하는데 그 지지자들만 아니라 반대자며 적대자 들까지 나서서 그러나, 피해자만은 더 용납 못한다고 나선다. 때론 적의를 표출하여 때론 무시하고 냉대하여 가하는 공격자들은 가해자의 분신이거니와 가해자가 언제 어디서든 거둥하고, 육신을 바꿔서라도 다가올 수 있게 하는 위협적인 편재다. 앞의 이야기(노팅힐)은 허구의 창작물이지만 이어진 이야기는 지금 여기서 벌어진 현실이다.

진행 중인 이 사건은 법원에선 최종판결 후 사건 정료 처리되어 문서고 안에 머물겠고, 위력에 의한 성폭력을 인정한 첫 사례로 앞으로 발생할 피해 일부를 막고, 시민의 참여와 분명한 목소리가 어떻게 사회의 이 부분을 성장시킬 수 있을지 희망을 던져 주었다. 그러나 이 단 하나의 사건조차 피해생존자의 치유와 안녕을 끈질기게 괴롭히며 들러붙어 생존하고 있고, 이 사회로부터 제대로 종결을 선언해 응답받지 못했다.

우리는 안희정과 헤어지지 않았다. 정치인으로서 그가 받았던 지지는 그가 제시한 전망과 실천하고 주장한 정책 들을 향한 것이다. 그것이 옳다면, 좋다면 다른 이들이 이어받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어떤 개인의 생에 그가 지울 수도 끊을 수도 없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가 피운 악한 영향력과 단호히 결별하지 않으면 다음번에 이름만 바꾼 “김지은입니다”를 스크린으로, 지면으로 반복해서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그들은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 미우나 고우나 우리에게 속하고 우리가 그들에게 속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다양한 소수자, 사회 각 성분의 수용과 이해, 대화를 계속하는 움직이는 통합, 자연, 우리들 “공동의 집”을 돌보는 데 대하여 우리가 할 일이 아주 많다. 하나같이 시급하다. 명백한 가해와 피해조차 흐리우고, 피해자를 가해자로부터 안심하게 분리시키지 못하는 우리는, 이 사회는 구태와 작별하지 못하고 바로 그 손으로 맞잡아야 할 미래, 희망, 가치, 공동의 삶, 이 모든 생존과 존엄을 스쳐 지나보낼 것이다.


한 명의 피해자를 구하고, 구하지 못해도 곁에 서 주지조차 못하는 사회는 공동살해자이며 살해자를 양성하고 온데 풀어놓는다.

우리는 작별하고 분리해야 한다. 편재를 끊는 데에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더 깊이 연대하고, 본래 지닌 연결을 어루만지려면, 거기서 영양을 공급받아 생명을 키우려면, 알았다. 당신에게 이것은 잔소리. 당신은 온세상에서 당신이 할 일을 할 줄로 믿는다. 아침에 나는 지난 저녁보다 밝은 하늘을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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