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 물거품 같이 읽기-스물세 번째날

천상에 사는 영혼들은

by 이제월


출판된 본문⟫ n.23

천상에 사는 영혼들은 지상에 살고 있는

인간의 고통을 부러워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원문⟫

Do not the spirits who dwell in the ether envy man his pain?



새로 한 번역⟫

에테르 속을 사는 영들은 그의 고통 때문에 인간을 질투하지 않습니까?



읽기글⟫

천상에 사는 영혼들.

천상이란 공간적인 이념이 아니라

어떤 영원성, 완전성을 표상하는 것이겠죠?

그렇다면 천상-우리가 흔히 말하는 천국은

맨 먼저 상처로부터, 오류로부터 보호받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지브란의 저 물음은 참으로 도발적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이 작은 책(모래물거품)을 쥐고 읽는 것 자체가

저’천상’에 들려는 노력,

조금 더 다가서려는 노력에 다름 아닐 테니까요.


또한 원문을 직역하면 소리 내는 대로 ‘에테르’로 옮기게 됩니다.

동양의 ‘기’(氣)를 정확히 옮길 말이 없는 것처럼

ether(에테르)도 우리에게 정확하게 옮길 수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얼추 그 뜻을 헤아릴 수는 있지요.


에테르는 20세기 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우주를 가득 채운 물질로 추정했던 것입니다.

동시에 수많은 영학자(靈學者)들은 에테르가 생명의 기원, 생명 자체라고도 생각했습니다.

굳이 우리말로 옮긴다면 생기(生氣)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생기 속에 사는 영체(靈體)들은 신체(身體)를 지닌 우리처럼 다치거나 쇠하지 않고

마찬가지로 한계에 부딪치지도 않기 때문에 고통받을 일이 없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렇지만 고통받지 않는다는 이 결과의 원인부에는 부딪칠 경계가 없다는 것, 다시 말해

어떤 것도 실제로 만날 수 없고

실제로 만날 나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그들을 모르고

그들에 대해 무어라 말할 수 없지만

어렴풋하게나마 그런 (채로 있다면) 그들이 ‘실감’(實感)을 가져 보았을까 물을 수 있습니다.


빔 밴더스(Ernst Wilhelm Wenders) 감독이 연출한

《베를린 천사의 시(詩)》라는 영화를 보셨는가요?

페터 한트케와 함께 각본을 쓴 이 작품의 독일어 이름은

'Der Himmel über Berlin'이며, 영어 이름은 'Wings of Desire'입니다.

각각 베를린의 천국(베를린을 통해 이르는 곳이라고도, 베를린과 병렬한 곳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열정의 날개 정도로 옮길 수 있겠습니다.


거기에서 천사 다미엘이 영원한 생명을 버리고

인간의 유한한 생명을 택합니다.

유한한 생명을 택한다는 것은

인생에 종말이 있다는 것뿐 아니라

그 생명성이 한계를 갖는다는 것,

더 적게 듣고, 더 적게 보고, 심지어 갈 수 있는 곳도 가지

못하곤 한다는 것을 뜻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러나 상처란 얼마나 또 아름답습니까?

그것은 지상의 존재들이 ‘살아 있음’을 자각하는

가장 탁월한 경로이지 않습니까?

그것은 탄생을 예견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빔 밴더스의 ‘천사’나

지브란의 ‘에테르 속을 살아가는 영들’은

저 삶의 구체성, 틀릴 수도 있지만 넘치는 역동성을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그 사랑이 다름 아닌 ‘사랑’에 대한 갈구이기에 더 아름답습니다.


모든 것을 이해해서 희로애락에서 벗어난 사람보다

비록 그 모두를 느끼고 아파하지만

묵묵히 제 길을 걷는 사람이 더 아름다워보이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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