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뽕 그리고 안티고네: 즉시, 전부를 원한다
소포클레스는 아이스퀼로스, 에우리피데스와 더불어 그리스 비극의 3대 작가로 꼽힌다. 나아가 ‘그리스 비극의 완성자’로 추앙받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미학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소포클레스는 거의 넘어설 수 없는 완성의 경지에 다다른 인물이다. 이견이 있지만, 그의 작품 중 「안티고네」는 타격감만큼은 최고라고 느낀다. 20세기의 걸출한 극작가들이 안티고네를 개작하여 자기만의 구별된 안티고네를 무대에 선보였다. 장 아누이, 베르톨트 브레히트, 장 콕토 등. 1948년 발표된 브레히트의 안티고네는 시간을 거슬러 제1 차 세계 대전을 인용하지만, 장 아누이의 작품은 제2 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때 나치 괴뢰 정부인 비시 정권 하 파리에서 작품을 쓰고(1942년) 무대에 올렸다(1944년)는 점에서 특별하다. 어떤 과거나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를 상상하는 연극이었던 셈이다. 그 현재성은 놀랍게도 지금도 여전하다. 한 번 현재에 현신(現身)한 예술은 영원토록 현재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2016년 겨울 한국예술종합학교 졸업 작품으로 장 아누이의 <앙티곤느>를 보았다. 그 전율은 잊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고, 두 해 좀 지나서 중학생들과 <말과 글> 수업을 하며 즉석에서 극 중 일부를 독백하기도 했다.
“난 즉시 전부를 원해요. 온전한 전부가 아니면, 거절이에요!” “아니면 죽겠어요.”
학생들은 수년이 지나고도 그 순간 그 장면, 그 말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2022년 대한민국과 세계 여러 곳에서 사람들을 열광케 하고 있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이하 우영우)의 최신 회차(2022년 7월 27일 방영분-9화)는 우영우“보다 더 이상한” “방구뽕 씨”를 소개해 주었다. 드라마를 아끼는 많은 분들이 앞서처럼 이 회차에 대해서도 수많은 정보와 해석을 안겨 줄 테니 나는 굳이 거기에 끼어 들지 않겠다. 그러나 방구뽕이 “즉시 전부”를 원한, “온전한 전부가 아니면, 거절”을 선택한, 그 거절이 ‘죽음’에 이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결연히 죽기를 결심한 안티고네, 그 결심이 풀어지지 않고 단단히 맺혀 다른 죽음과, 죽음을 거부하는 숱한 삶까지도 이어지는 안티고네, 처음의 안티고네. 또는 안티고네나 크레온이 의식하듯 오이디푸스 다음의 안티고네, 그를 연상시킨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앙티곤느, 안티고네의 희랍어는 Άντιγονη 이다. 이는 anti/instead + gonad 의 결합이다. gonad는 동물의 생식샘 즉, 세대를 잇는 생식세포를 만드는 인체 기관을 뜻한다. 남자의 경우 고환, 여자의 경우 난소일 것이다. 안티고네의 이름 뜻을 찾으면 흔히 ‘거꾸로 걷는 자’ ‘거스르는 자’ 정도로 설명이 나오는데, ‘무엇’을 거스르는지, ‘무엇’에 반대하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 무엇을 비워 두고 천변만화하는 것도 좋겠지만, 문제는 이름이 이미 무엇을 반대하는지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뜻을 비운 것도 의미롭지만, 뜻이 있는 것을 감추는 건 다른 문제다. 안티고네의 이름을 직시하는 것은 그렇게 힘든 일일까?
크레온은 테베의 최고 지도자이지만 연거푸 일어난 변고로 인해 엉겁결에 권력을 계승했고, 폴리스를 안정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그에게 맞서고 그를 곤경에 빠뜨린 건 조카와 아들이었다. 둘은 그가 사랑하는 이들이며, 그들 둘이 서로를 사랑하는 이들이며, 어쩌면 그를 이어 왕가를 존속시킬 핏줄이었다. 그러나 그 가장 가까운 이들이 그에게 맞섰고, 죽음을 향해 갈 때, 그는 여러 번 이를 멈출 수 있었음에도 법 뒤에 숨어 자기 책임을 다함으로써 죽음을 방조한다. 크레온은 인과를 믿는 사람이고, 스스로를 인과율 속에 가둔다. 그런데 그 인과는 진짜인가, 법은 진리를 대변하는가? 크레온은 질서와 안정을 부르짖지만 거기에 어떤 목적이나 가치가 있는가 말하지 못한다. 적어도 그의 대답은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를 변호하자면 전부가 아닌 그것에도 일부는 들어 있고, 그 일부는 ‘나중’에 전부가 일어날 수 있도록 혹은 있기까지 그 일부-그러므로 자기자신을 보존할 만큼은 껍질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만족하는 누군가도 있겠지만, 안티고네는 그러하지 않다. 안티고네는 “즉시” “전부”를 원한다. 그렇지 않은 희망과 행복을 거절한다. 그러느니, 그런 삶 대신 “죽겠”다는 게 그의 뜻이다. 그리고 그것이 철부지의 망상과 억지가 아니라 진짜일 때, 실행되어 증명될 때, 하이몬이 죽고 에우리디케가 떠나고, 크레온은 혼자 남는다. 크레온이 지켜러던 것 중 어느 하나도 제자리에 남지 못한다.
비시 프랑스가 지키려던 것, 기성 세대가 갖은 핑계를 대며 지키려던 것은 아무것도 아니며, 지켜 주겠다고 한 이들은 지키지 못하고 부수었고 떠나보냈다는 것을 장 아누이는 말하고 싶었던 걸까?
안티고네는 혈통에 반대하고, 재생산의 의무를 반대하고, 과거의 유적을 반대한다. 그 축적된 유산은 그대로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가 아닌가에 따라 매순간 선택하거나 버림받아야 한다. 안티고네는 그렇게 느끼고, 그렇게 느끼므로 그렇게 행동한다. 우리들 대부분이 그렇게 느끼지만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것과 다르다.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죽을 수 있다는 것, 곤궁하게 괴로움을 겪다가 메마르고 말라 죽을 수 있다는 걸 안다. 그래서 우리는 거짓 행복과 거짓 희망으로 목숨을 지킨다. 법을 핑계 삼아 질서를 옹호하고 마음속에서 느끼는 진실들을 입 다문다. 우리는 안티고네가 아니다. 우리는 고네의 숭상자들이지 감히 고네에 앙티/안티하지 않는다.
안티고네는 타락한 오이디푸스의 딸이지만 신화에서 딸의 도리를 다한다. 스스로 눈먼 오이디푸스의 곁을 지킨다. 그러나 또한 슬픈 운명으로 죽기도 한다. 신화는 안티고네의 삶과 죽음, 운명에 대해 여러 가지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분명한 건 안티고네가 전대의 잘잘못을 답습하고 반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승계하고자 하는 것을 승계하고 그럴 뜻이 없는 것은 불승계한다, 그리고 이 모두가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차라리 거절한다.
방구뽕은 어린이에 대해 “당장” 놀고, “당장” 건강하고, “당장” 행복할 것을 선언한다. ‘나중’에 하자고, ‘나중’에 할 거면 지금은 놀지 않고, 건강을 해쳐도 되고, 행복을 유예해도 된다고 하는 어른들, 세상에 대해 그것은 ‘거짓말’ ‘거짓 주문’이라고 일갈한다. 방구뽕과 아이들은 웃고, 또 웃고, 큰소리로 외친다. 심판의 날은 축제다.
안티고네에게, 방구뽕에게 죽음이나 유죄 판결 같은 것은 아무렇지도 않다. 그들의 신체, 생활과 목숨까지도 구속하겠으나 그들은 여기 시민이 아니다. 그들은 영원에 속해 있고, 그들이 너그럽게 이 유한하고 후회할 것이며 변경될 것인 법과 제도에 순종할 때조차 ‘이의’ 있다고, ‘동의’하지 않는다고 자기 생각을 설파한다. 그들은 정신 때문에 자유롭고, 정신 때문에 숭고하다. 그들의 모든 무책임과 범죄는 그래서 무죄하고 진리 앞에 책임 있다.
우리들은 과거를 반복한다. 잘못을 되풀이한다. 틀렸다고 생각하고 불행해하면서도 바꾸지 않는다. 그런 우리가 맞서 싸우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에 맞서서 안간힘을 다 써서 버티고 있는가. 대체 무엇이 우리를 바꾸지 못하도록 의지를 다하는가.
필연이다.
안티고네는 필연에 속한 사람이다. 방구뽕은 필연에 속한 사람이다. 그들은 우리들의 우연을 부순다. 우리들의 우연에 필연의 빛을 비추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필연인 척 가장하는 가짜라는 것을 드러낸다. 크레온처럼 우리도 필연에 맞서다 하이몬을 잃고 에우리디케를 잃고 테베를 망가뜨릴 것이다.
그러나 필연이 이길 것이다.
우리가 패배할 때 기뻐하기를 바란다. 기뻐할 수 있는 우리는 조금 더 그 패배를, 우리가 만들어낸 우연의 실패와 도저한 필연의 ‘즉시, 전부’를 원하는 승리를 용이하게 해 줄 터이니 말이다.
비록 앞장서서 안티고네 편에 서지 못하더라도 못이기는 척 물러날 수 있기를, 그리하여 우리의 안티고네가 죽는 일이 없기를, 하이몬이 따라 죽는 일이 없기를, 방구뽕이 법정에서 풀려나 해방시키고 싶었던 이들 곁에서 같이 해방을 누리기를.
우리의 패배를 기원한다.
나는 우리의 패배를 위해 나와 싸울 것이다.
안티고네 | 나는 모든 것을 당장 원해요. 그리고 그것이 전체이기를 원해요. 그렇지 않다면 거절합니다! 나는 겸손하고 싶지 않고, 온순했다면 얻을 수 있는 작은 조각으로 확신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오늘 모든 것에 대해 확신하고 싶고, 그것이 내가 어렸을 때만큼 아름답기를 원해요. 아니면 죽기를 바랍니다.
크레온 | 자, 네 아버지처럼 시작하렴, 시작해!
안티고네 | 나의 아버지처럼, 그래요! 우리는 질문을 하며 끝까지 캐내는 사람들입니다. 정말로 조그만 희망의 불씨도 살아 있지 않을 때까지. 없애 버려야 할 가장 작은 희망도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요. 우리는 당신들의 그 소중한 희망을, 당신들의 그 더러운 희망을 만나면 그것에 덤벼드는 사람들입니다!
(중략)
코러스 | 크레온, 안티고네를 죽게 내버려 두지 말아요! 수백 년 동안 우리 모두 옆구리에 이 상처를 지니게 될 겁니다.
크레온 | 죽기를 원했던 건 그 애요. 우리 중에 아무도 그 애에게 살 결심을 하게 할 만큼 강하지 않았소. 나는 이제 이해하겠소. 안티고네는 죽게끔 되어 있었던 거요. 어쩌면 그 애 자신도 몰랐겠지만, 폴리네이케스는 핑계에 지나지 않았던 거요. 폴리네이케스 일을 체념해야 했을 때 그 애는 곧 다른 것을 찾아냈소. 그 애에게 중요했던 것은 거절하고 죽는 거였소.
(중략)
메신저 | (전략) 안티고네는 무덤 깊숙한 곳에서 허리띠 끈으로 목을 매고 있는데, 파랑 끈, 초록 끈, 빨강 끈이 마치 어린애 목걸이처럼 그녀 목에 걸려 있어요. 그리고 하이몬은 무릎을 꿇고 그녀를 자기 품 안에 안고서 그녀 옷에 얼굴을 파묻은 채 구슬피 울고 있는 거예요. 사람들이 돌무더기를 다시 치우고 마침내 크레온이 그 안으로 내려갈 수 있어요. 구덩이 깊숙한 곳 어둠 속에서 그의 흰 머리카락들이 보여요. 크레온은 하이몬을 일으켜 세우려고 하며 그에게 애원하지요. 하이몬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아요. 그러더니 갑자기 하이몬이 증오에 찬 눈빛을 하고 벌떡 일어서는 거예요. 그가 예전의 어린 소년 시절의 모습과 그토록 닮아 보인 적은 없었어요. (후략)
―장 아누이, 「앙티곤느」(박영률 번역)
(커뮤니케이션북스에서 펴낸 지만지드라마 중 『장 아누이의 안티고네』를 제목으로 출간)
그러자 분을 삭이지 못한 왕자님은
자신의 칼에 옆구리를 들이대었습니다.
칼은 옆구리 깊숙이 박혔고 마침내 쓰러지셨죠.
왕자님은 죽으면서
안티고네를 부드럽게 포옹하셨고,
그의 옆구리에서 뿜어져 나온 피는
그녀의 하얀 볼을 선혈로 물들였습니다.
시체에 시체를 쌓아 마침내 결혼을 했고
망자의 세계에서 두 분은 한 몸이 된 겁니다.
왕자님의 죽음과 안티고네의 죽음은 이제,
현명한 충고를 거부한 오만한 인간의 죄가
얼마나 큰가를 만천하에 밝힌 것입니다.
―소포클레스, 「안티고네」(김종환 번역)
죽음을 빼고 삶을 생각하는 건 반칙이 아니라 오류다.
헤세가 쓴 [싯달타]의 익숙한 구절을 펴든다. 아니다. 익숙하다고 여긴 그것이 아니다. 그건 차라리 [안티고네]의 다른 버전 같다. 마치 누가 책을 바꿔치기한 것처럼 같지만 미묘하게 다르다. 아무튼 펼쳤더니 이렇게 써 있다.
“이대로 서서 기다릴 것입니다”
“너는 피로할 것이다, 싯달타”
“저는 잠들지 않을 것입니다”
“너는 죽을 것이다, 싯달타”
“저는 죽을 것입니다”
(유혜경 역)
그는 다른 것은 부정하여 저항했지만
죽음에는 긍정하여 저항하였다.
죽음은 마침내 아군인 것이다.
살려는 자, 죽음부터 생각할 것.
2018.12.5. 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