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필수와 우영우
지난 4월 KT 의 ‘스튜디오지니’가 미디어 생태계 발전 전략을 발표할 당시 2024년까지 방영할 24종의 드라마를 공개했다. 그중 첫 번째 작품은 <구필수는 없다>, 두 번째 작품은 현재 절반인 8화째 방송 중인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이다.
만듦새가 낯설고 어딘지 불균형하다고 느끼면서도 <구필수는 없다>(이하 ‘구필수’)를 ‘정주행’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이하 ‘우영우’)도 기꺼이 정주행하고 있다. 넷플릭스를 통해서 시청하다보니 TV 시청자보다 약간 늦깍이로 시청하지만 그래도 같은 날, 잠들기 전 보고 있다.
구필수가 주는 낯선 느낌은 완성도가 낮아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었고, 시청자를 괴롭히지 않고 착착 치면서 곧게 나아가는 이야기 방식 때문이었다. 잠깐 방식보다 주제를 먼저 살피자면 구필수의 첫 두 화를 보면서 조마조마하던 마음이 사실로 나타났는데,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결국 ‘물질’이고, 그 물질이 제 값을 발하는 것은 물질의 소유주, ‘늙은이’가 죽으면서부터였다. 그 전에 물질이 효능을 발휘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전부 제한적이었고, 이 제한은 다행하게도 또는 이상하게도 ‘당분간’이었다. 물질의 원 소유주가 가난한 뭇 ‘이웃’이라는 겉바속촉의 주문이 걸려 있지만, 그 모호한 연결보다는 이 모든 게 천만금 여사 것이라는 주장이 더 직접적으로 와 닿는다. 그러나 천만금 여사는 그것으로 어떤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아니고 회한이 쌓일 뿐이었다. 그의 삶에는 그가 많이 가진 탓에 덜 가진 다른 방식의 다음 세대, 그다음 세대가 대기하다 비집고 들어왔고, 이 개입이 ‘초대’의 형식이 아니었다면 드라마는 꽤나 스릴러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드라마는 영리하게도 이 부분을 감추지 않아서 시청자가 느낄 스릴을 장면과 음향으로 뒷받침해 주기도 하지만, 워워~ 진정해, 하며 이건 참 즐거운 이야기란다, 주문을 건다.
문제의 해결이 성장보다 분배에 있다는 것, 물질의 적합한 주인과 현실의 실소유주가 불일치한다는 것을 이렇게 가볍게, 비장하지 않게 이야기한 작품이 많지는 않은 것 같다. 구필수는 구필수가 굽힐 수 없다며 애써서가 아니라 그 뒤에 천만금 여사가 버티고 있고, 그가 자리하는 시간이 ‘당분간’인 데 따라 마침내 굽히지 않고 살 수 있게 된다. 행위자의 행위는 직접 어떤 보상을 주지 않지만, 그 공로를 값없다 여기지 않고 값 있다 여기는 누군가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행위 없이 보상받는다. 공로 없이 한 자리 얻는다. 그것을 거절하는 것이 곤란하고 무례하며 불가한 일로 제시된다. 드라마 구필수 안에서 구필수는, 또 다른 많은 이들은 늘 무언가를 하지만 애초 그것은 결실을 맺을 수 없고, 결실을 맺는 원동력과 자원이 외부에서 온다. 천만금, ‘돈여사’는 ‘외부에서’ 오는 자이고, 그게 가능하도록 ‘외부에’ 있어야 한다. 다만, 아무도 미안하거나 꺼림칙하지 않게끔 돈여사가 먼저 그들을 초대했고, 그들도 돈여사가 자기 능력으로 얻을 수 없는 것(보통 이웃, 친구 들)을 한 번의 잔치로 ‘주었다’고 ‘간주’된다.
무척 많은 설명과 도덕적 논증이 필요한 결론과 전개를 드라마는 애쓰지 않고 ‘당사자들이 좋다’는데 뭐가 문제냐며 슥슥 그려 나간다.
극작가만 아니라 시청자들, 작가만 아니라 독자 대중도 이미 언제 쫄깃해지고 언제 탄식이 나오는지 알고 있다. 그것은 인류 공통에게 보편한 현상이요 성정이어서 별날 것도 없다. 다만 한참 동안 이를 매우 공들여 장치들을 설치하고 설치하고 장식을 나열하고 나열해서 보여지던 것들이 지금은 그냥 ‘말하여’진다. 이 ‘말하는 방식’은 글쓰기도 드라마나 영화의 보여주기도 어느 만큼 밀어내는 것 같다.
동시대 작가로 불림받는 몇몇의 작가들의 글은 재밌지만 문장이 성글다. 뇌리에 남거나 입으로 되뇌일 명문이 없다. 그런 건 차라리 예능에서 국민할매나 유느님의 입에서 나오기를 기대하는 편이 낫다. 지금 작가들은 작가 ‘선생님’이 아니라 ‘스타’이고 ‘아이돌’이고, 가장 긍정적으로 ‘이웃’이다. 그들은 뛰어나서보다 공감할 수 있게 이야기하기 때문에 주목받고 대접받는다. 그들은 에두르는 걸 싫어하고 어차피 빤한 건 이미 다 아니까 시원시원하게 말하고, 저지르고 지나간다. 굳이 각각의 이야기에 무얼 들이부어 생기 돋우려 하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이야기는 ‘디지털’ 신호로서 전시되고 수용된다. 이것이 나쁘단 말은 아니다. 무언가 곡진한 것이 사라져가는 애잔함은 느끼지만, 뭔가 문턱을 낮추고 누구나 더 쉽게 즐기는 어떤 ‘문화적 민주화’마저 느낀다. 그것은 피할 수도 없거니와 필요한 좋은 것이기도 하다. 다만 그것뿐일까 염려하기는 한다.
우영우는 예전 검블유에서 맛본 쾌감을 다른 층위에서 겪게 해 준다. 구필수에서 의심스러운 시도를 말끔하게 ‘이젠 이거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스타일’로 완성시켜서 보여 준다. 이런 건 설명하는 것도 아니고 설득하는 것도 아니다. 두 편의 <탑건>에서 활공하는 느낌을 만끽하는 것처럼 누리는 것이고, 마음껏 드시는 것이다. 마음껏 잡숫고 각자 소화하면 그만이지 동일하게 해석하거나 소화할 이유도 없고, 각자가 그렇게 느꼈다면 그런 거지 거기에 정답이나 정석이 있지도 않다. 우리는 전에 먹지 않던 것을 먹게 된 것이다. 재료도 색다르고 조리법도 다르며, 먹는 방식과 문화도 제멋대로 즐기는 새로운 것이다.
우영우는 무얼 심각하게 피해가지 않고 말이 되게 짜 맞추려 들지도 않는다. 그러면 그럴수록 인물은 살아 숨쉬고 간단하게 크로키 한 것 같은 인물과 사건, 관계도를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완성한다. 빈틈을 주니까 틈없이 메꾼다. 그러나 탄소 기반 몸뚱아리마냥 단단하고 한 자리에서 생육하지 않고 단백질 기반 몸뚱이라는 듯이 꽉 찼지만 유연하고, 수축하고 팽창하며 운동한다. 활동한다.
지금 드라마는 다른 경지를 건드리고 있다. 이야기하는 방식이 바뀌었다. 문장이, 장면이 전부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신호’를 주면 대중이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우린 그걸 알지. 우린 우리야. 배경음악이 들리는 것 같다. 노래 위로 춤사위가 튀어오르는 것 같다.
우영우는 단지 장애에 대한 편견, 도식적 인물에 대한 평면적 이해 같은 걸 깨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이야기하고 이야기를 수용하는 우리의 방식, 문화적 ‘식문화’를 바꾸고 있다. 문학판에서 비주류 장르 문학(SF)이 주류로 호출되고 전통적 장르 지지자의 방식과도 다르게, 전통적 주류 문학과 비평의 한계에도 갇히지 않고 흐르고 있듯이, 이른바 K드라마 안에서도 무언가가 흘러넘치고 있다. 이 스타일은 긴 시간 다양한 미디어를 오가며 형성된 장르를 가볍게 넘어서 이 장르와 저 장르를 한 그릇 비빔밥으로 비벼 넣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재료의 맛도 조리 방식도, 그것을 맛보고 나누는 방식에도 길들고 있다. 기꺼이 스스로 길들이고 있다. 우리는 질러 간다. 에두르지 않고 질러가며, 부과된 무게에 눌리느니 그릇을 없애고 비우고 가 버린다. 싹 다 잡술 모양이다. 빈 그릇에 남은 건 손가락으로 닦아 먹자. 비평이 낄 틈이 없다. 전과 다른 비평을 만들어오지 않으면, 밥과 탄산이, 면과 맥주가 어울리는 걸 막을 수 없다. 간혹 끔찍한 혼종을 보겠지만, 전체로는 팔짝팔짝 뛰며 손뼉을 짝짝 칠 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