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져나옴과 드높여-우러름 사이에서
교육의 토대는 진실이며,
으뜸가는 진실은 모든 것이 하나라는 것, 연결의 진실이다.
이 연결의 원리는 의사소통과 의사결정의 되풀이가 되먹임이 되는 것이며,
기쁨과 감사가 이를 추동한다.
그리고 기쁨과 감사 사이, 기뻐함과 고마워함 사이,
다시 말해 터져나옴과 드높여-우러름 사이에는
인내가 있다.
인내란 견딤, 참음이다.
무엇을 견디고 얼마나 참는가?
즉, 어떻게 견디는가?
인내의 원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그냥 참을 수 없다.
그냥 참는다고 할 때 그것은
고통을 견디는 것인데
고통을 고스란히 받아 안는 것을 일러 견딘다고 한다.
이 견딤에 의지를 싣는 행위를 참는다고 한다.
언제든 쳐낼 수 있지만, 밖으로 쳐내는 대신
자기 안으로 쳐낸다. 차오르는 것을, 치밀어오르는 것을
다시 안으로 밀어넣는다.
그냥 억누른다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쳐넣는다.
이 치어냄은 어떻게 가능한가?
고통이 그것을 만들 수 없다.
우리는 고통을 [밖으로] 쳐낸다.
이것은 생명의 본성이고,
생물이 항상성을 유지하는 방식이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쳐냄과 쳐내려함이 곧 고통이다.
고통이라는 신호, 시그널(signal)은
그것을 부정할 수 없도록
반드시 응답하도록, 그것도 ‘즉시, 전적으로’ 응답하도록
가장 강한, 나머지 모두를 부정하고 정지시키는 신호인 것이다.
그 신호의 이름이 고통이기에
고통이 다른 무엇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고통을 참는다는 것은
고통 아닌 다른 것, 그런데 고통보다 조금도 뒤쳐져서는 안 되고
고통과 함께 동시에 곧장 오는 것, 고통의 짝이어야 한다.
고통의 짝은 무엇일까?
분노? 공포? 우울?
고통의 참된 짝은 연민이다.
분노니 공포니 우울이니 의심이나 하는 것들은
고통을 뒤따르는 것, 고통이 나타나면 추종하는 똘마니들이다.
부속물은 아니라도 종속되는 성질을 갖는다.
그러나 연민은 고통과 함께 찾아와 고통 곁에 서 있지만
조용히 아무 말 없이 서 있는다.
고통이 어디에 이르든 빠지지 않고, 쳐지지 않고 반드시 함께
고통만큼 크게, 고통만큼 높게 서 있다.
다만 고통이 강제할 때
연민은 강제하지 않는다.
연민은 고통에 놓인 이가
심지어 타인의 고통을 보는 이가
‘보는 이’이다.
봄으로써 보이고, 보임으로써 보게 하는 자가 연민이다.
그리고 연민은 초대자이다.
고통은 침입자이고
연민은 초대자이다.
침입자가 아니라 초대자가 주인이다.
고통의 신체적 기능은 뭇생명과 동일하게
살아남으라는, 지금 죽을 수 있다, 다칠 수 있다, 생명이 손상될 수 있다는 경고 신호이지만
연민은 정신에 기능한다.
연민은 오직 정신을 깨우고, 오직 깬 정신에게만 수신된다.
연민은 고통을 벗어나는 대신 고통 안에 머물도록 종용한다.
고통을 참고 견디라고 재촉한다.
고통은 지금 여기가 ‘아니’라는 신호이지만
그래서 어쩌란 건지는 알리지 않는다.
그래서 어쩌란 건지 말하는 것이 연민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메시지는 연민 안에 있고, 고통은 연민의 메신저일 뿐이다.
그러면 연민은 무얼 어쩌라고 하는가?
연민은 이 애달픔을 애닯아하라고 이른다. 슬퍼하는 자 더욱 슬퍼하라고 한다(윤동주를 기억하라).
슬픔이 복되다고 한다. 이렇게 정면으로 직시하면 슬픔은 허물어진다.
다 슬퍼하면 기쁨이 온다.
기쁨이 서서히 차오른다.
기쁨의 재료는 다른 게 아니라 슬픔이다.
슬퍼하지 못하는 자는 기뻐할 수도 없다.
슬픔은 현실을 직시하고, 현실 너머를 직관하게 한다.
둘 다 보는 것이지만, 직시할 때 시선은 육체를 넘어설 수 없고, 경험에 제한된다.
직관할 때 시선은 오롯이 정신에 달리고, 정신은 다른 정신들과 이어진다.
육체는, 피부로 단절된 조각들이다.
육체는 부서져서야, 자기 자신의 결합 원리가 해제될 때에야, 다시 말해 정신이 떠나고서야
부서져 그저 몸으로, 온땅, 온누리에 하나로 결합한다.
반면 정신은 살아 있을 때, 몸 안에 있든, 몸을 떠나서든,
산 자에 대해서든 죽은 자에 대해서든, 심지어 오롯이 소멸되어 사라진 자들에 대해서까지
정신 대 정신으로 마주서고, 이어진다.
당신은 그 목소리를 듣고, 그 낯빛을 읽을 수 있다.
묻고 대답을 듣는다.
인내는 슬퍼하고 부서짐이다.
다 슬퍼하면 그것으로 기쁨이 차오르고
다 부서지면 그로 해 감사한다.
다른 무엇 때문이 아니라 그로 해, 그것으로.
아서라, 인내로 승리를 꿈꾸지 마라.
인내의 목표는 그게 아니다.
인내는 고통이 깨져 ― 그리고 고통은 오직 고통받는 이가 깨짐으로써만 깨지며 ―
슬픔이 자라는 데 향해 있다.
깊은 연민은 차별을 없애고, 단절을 끊는다. 끊어야 할 유일한 것을 끊는다, 착각 그리고 공포, 무지의 두 자식을.
기쁨과 감사 사이에 인내가 있다.
고통이 깨지면 연민이 움튼다.
아프면(痛) 통한다(通).
그러므로 희망한다.
이 짙은 어둠 안에서. 어둠과 함께. 어둠을 통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