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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와 당신

by 이제월

비와 당신




오후부터 내린 비는 그치지 않고 이튿날로, 그이튿날로 이어졌다. 창밖에는 소방 호스로 뿌리는 듯 굵은 물줄기가 틈없이 쏟아졌다. 모든 예보가 빗나갔고, 이제는 누구도 언제 이 비가 그칠지 말하지 못했다. 본래부터 인간이란 예측 따위 할 수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빌멀에서는 이미 몇 개 마을이 잠겼고, 당신이 자랑하던 멋진 골짜기는 평평하고 넓은 호수가 되었다. 이 와중에도 전기가 공급되고 통신이 연결되는 게 신기하지만, 이 연결은 점점 끊기고 줄어들고 있는 게 확실했다. 서서히 눈이 감기듯이, 아니, 떼지어 반짝이던 반딧불이가 무언가에 놀라 한순간 흩어져 빛을 잃듯이, 빛을 보던 눈이 어둠에 더욱 멍해지는 것처럼, 나는 조만간 바보가 될 거라 생각한다.

언젠가 천년 동안 내리는 비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당신이 그 말을 할 때,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도 비가 온 건 백년뿐이라고 받아쳤다. 나는 웃었는데, 당신은 웃지 않았다. 진지하고, 무언가 더 할말이 있다는 듯 정지한 표정이 선하다. 하지만 당신은 금방 표정을 풀고 화제를 옮겼다. 닷새 전 당신과 나눈 마지막 통화에서 당신은 빌멀은 다 잠겨 가고 있고, 나갈 수는 없을 거라고, 나에게 더 해 줄 이야기가 있었다고, 그걸 전하지 못해 아쉽다고, 그렇지만 괜찮다고 말했다. 아니, 당신의 마지막 말은 그게 아니었다. 그때 벌써 얘기했잖아, 당신이 듣지 않았지.

통화가 끊기고 암전된 화면을 보다가 검은 화면에 내 얼굴이 비쳤다. 서서히 물밑에서 떠오르듯 아련하게 그날의 대화, 그날 이야기의 부분부분이 생각났다. 명료하게 언어가 되지는 못하고 물에 비친 반영처럼 일렁였지만, 큰 형체는 알아볼 수 있었다, 기억이 났다.

몇 달째 닫아둔 창문을 열었다. 빗방울이 몸에 닿았다. 바깥에는 이미 유기체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빗방울이 닿자 내 몸도 기화하는 것이 느껴졌다. 다시 모일 수 있을까. 다시 뭉치거나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때에는 너무나 달라졌거나,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당신은 분명 빗속에서 다시 세계가 열릴 때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해 주었다. 정신이 어떻게 몸에 깃들고, 어떻게 몸이 되고, 다시 그 몸이 정신이 되는지 들려 주었다. 나는 농담처럼 웃어넘겼지만 실은 무섭고 불편했다. 그런 신화는 아름다운 것 이상으로 두렵다. 내가 알던 세계가 무너지는 게 이렇게 곧인 줄 알았더라면.

후회하는 건 아니다. 어쩌면 당신은 천번은 이렇게 같은 이야기를 해 주었을 것이다. 나는 세상의 중심이 아니지만, 당신은 중심으로, 나를, 이끌고 있었다. 이미 나는 한편 날아오르고, 한편 내리긋고 있다. 아주 조금 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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