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할 때 행동과 존재 자체가 저항이 아닐까-에 답하여

질문에 답하여

by 이제월

2023년 5월 31일 0시 19분 한 공부자의 물음에 대하여 쓴

2023년 6월 1일 제월의 답글: 아래.



저항하는 크기가

우리 실존의 크기입니다.


존재는 영원하나

아무런 저항 없이 빛이 달리는 우주 공간처럼

빛으로 가득 차기 때문에

컴컴합니다.


실존은 저항하여

유한한 크기로

유한한 시공간에 나타납니다.


욕망하는 것은 행위이고

다름아닌 ‘실존’의 행위입니다.


내가 무엇-임이 아니라

무엇-함일 때

그런데 그 무엇이 아직 되기 전

무엇-하고자/이고자-함인

이 돌발, 충돌이 욕망이고

곧장 발생한, 자기 자신이기도 한 ‘저항’을 통해

자기 자신이 이미 무엇-임을 느끼고

똑같이 그만큼 아직 무엇-이-아님을 느낄 때


그것에 기뻐하건 슬퍼하건 상관없이

우리는 그만큼의 실존으로 현현(顯現)합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서사는

하나의 인간-행위로 기술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작품에서 줄거리와 성격 중 무엇이 우선하는가 묻고는 스스로 답한 것입니다.

둘은 하나다.


왜냐하면 인간행위와 인간실존을

됨 다음에 보면 줄거리이고

함 앞에서 보면 성격이기 때문입니다. 성격 즉, 인물.


미학과 윤리학은 나란히

철학 안에서 ‘가치론’이라는 범주로 묶입니다.

이러한 전통적 분류는 여전히 유효한데, 형이상학-인식론-가치론 말입니다,

가치론은 인드라망(Indra-網)처럼

고정된 실체를 갖기보다

서로가 서로를 비춤으로써

‘생성’(生成, arising)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는 세계를 다룹니다.

그것이 어떤 몸을 가졌는가 묻지 않고

어떤 무게를, 다시 말해서, 저항을

지니는가, 발현(發顯)하느냐고 묻습니다.


“욕망할 때 행동과 존재 자체가 하나의 저항이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합니다.


그런데 이 대답은 ‘예’로만 수렴하지 않습니다.

‘예’[yes]에서부터 ‘아니오’[no]까지 수렴-발산합니다.

마치 숨쉬는 것처럼.

그리고 심지어 ‘예-아니오’[yes-no]마저 포함하며, 더 정확하게는

‘예-아니오’이기 때문에 ‘예’에서 ‘아니오’까지의 스펙트럼 전부에 분포합니다.

그것은 원자론으로 설명하기보다

양자론으로 설명해야 할 것으로서

그것은 분명 자신의 그것-임을 지니지만

그것-일 때에만 그것-이며,

그러기 전에는 아직-아무것-아닌 채로

이미-그것-입니다.



즉, 묻고 답하는 그 순간에 그러합니다.

그러나 다른 무엇일 수 있었고,

다른 무엇인 것을 부정할 어떠한 근거도 없습니다.

우리의 대답은 고정된 것에 대한 규정이 아니라

무한한 직선을 유한한 선분으로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유한한 선분 안에서 무한한 직선을 끄집어내는 것, 바라보는 것,

바라봄으로써

있게 하는 것에 더 가깝습니다.


예술과 삶을 잇고 싶습니까?

그런데 어쩌겠습니까, 이미 둘이 아닌 것을[不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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