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 공유 |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고 읽다

나는 이제 …이 되었다, 되었나, 되겠노라

by 이제월

나는 이제 …이 되었다, 되었나, 되겠노라




뤽 베송 감독의 〈잔 다르크〉(The Messenger : The Story of Joan of Arc, Jeanne d'Arc, 1999) 이후 이렇게 ‘인물’에 열린 영화를, 이렇게 거대자본이 투입된 주류 상업 영화 가운데 볼 수 있을 거라고 기대조차 해 보았던가? 배우의 연기로 입체감을 불어넣고 관객 저마다의 이유로 이입하고 해석이 갈리는 일이야 꾸준히 있어 왔다. 그러나 이렇게 작정하고 판을 벌려서 그 진실이 영화의 중심핵이 되고, 거기서 분열하고 거기서 융합해 폭발하고, 마음에 잔해를 남기는 일. 이제 사라졌다고 여긴 까다롭고 지치고 신경을 날카롭게 하는 수고를 강제하는 창작을 놀란 감독이 기꺼이 해냈다, 그의 동료들과 함께.

티비 프로그램 〈알쓸별잡〉에서 심채경 박사가 한 표현대로 놀란은 한국말로 하자면 깜짝 놀래키고(놀란), 서로 부딪치는 논란(발음상 ‘놀란’)을 일으켜, 중성자가 원자핵을 쏘듯 날아와 관객의 감각과 정신에 부딪쳤다.

가장 아름다운 건 훌륭한 배우들과 놀란 감독보다 오펜하이머가 더 남는다는 것이고, 오펜하이머보다 그에게도 똑같았던 인간의 고민이 더 남는다는 것이다. 여러 모로 연쇄반응을 겪고 있는 세계, 그리고 시대이다.

우리는 어디서부터 ‘나’와 ‘우리’를 함께, 또 옳게 쓸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놀랍고 마음을 논란에 몰아넣는 영화 〈오펜하이머〉(Oppenheimer, 2023)는 지난 세기말 〈잔 다르크〉처럼 양심이 거닐며 말을 걸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그가 보는 장면들, 그의 내면의 풍경이, 내면의 화자 대신 펼쳐진다. 그럼으로써 관객이 어떤 면에서 오펜하이머 자신이 된 것처럼 불안을, 혼동을 느끼도록 한다. 그럼으로써 오펜하이머의 진실을 믿고, 같은 까닭으로 오펜하이머의 진실을 의심하게 한다. 영화 내내 줄거리를 좇다 보면 어느새 그와 같이 고민하고 있고, 그에 대해 어느 쪽으로도 함부로 확신하지 못한다. 통상 이야기를 이끄는 중심인물, 이처럼 대놓고 주인공인 인물에 빠져들어 그의 입장에서 사물을 보기 마련이지만, 그가 재앙을 보고 주변 소리를 놓치면서도 다르게 말하고, 다른 태도를 취하는 것을 함께 봄으로써 우리는 이 복잡한 인물에게 동조(同調, sympathy)하면서도 결코 완전하게 공진(共振, resonance)하지는 못한다.


잔다르크는 성녀인가 마녀인가? 그녀는 계시를 보았는가, 망상에 홀린 광인인가? 오펜하이머는?

오펜하이머는 스스로를 『마하바라타』 중 「바가바드 기타」의 구절을 빌어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고 읊는다. 실제로 맨해튼 프로젝트의 성공 이후 인류는 스스로를 멸종시킬 수 있는 특이한 종이 되었다. 그래서, 오펜하이머 이후, 트리니티 실험 이후 우리는 ‘그는 누구이지?’ 하고 순진하게 물을 수가 없다.

오펜하이머가 누구인가 묻는 질문 뒤에 우리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으로서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대답해야 한다. 시절이 그렇다. 뒤늦게 알아차린 것뿐, 처음부터 우리 세대는 이 문답 위에 얹어졌다. 어떤 오징어 게임도 이 게임, 인생보다 잔혹하고 위태롭지는 않지만, 이번 판이 가장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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