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 물거품 같이 읽기-셋째날

단 한 번 침묵하지 않을 수

by 이제월


출판된 본문⟫ n.3

단 한 번 침묵하지 않을 수 없던 적이 있습니다.

누군가 내게 이런 질문을 던진 때입니다.

"너는 누구인가?"


원문⟫

Only once have I been made mute. It was when a man asked me, "Who are you?"


새로 한 번역⟫

단 한 번 나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군가 내게 물었을 때입니다

“너는 누구냐?”


읽기글⟫

아마 세상의 모든 일들에 답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 대부분은 그런 답을 할 수 있다는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가 어떠한 법칙이나 원리들로 많은 것들을 뭉뜽그려 이야기하지만

종종 우리의 경험은 직접 그것을 맞닥뜨릴 때 그러한 앎이란 게

삶과 괴리되면 괴리된 만큼 얼마나 편협하고 혹은 모자란 것인가를 말해주기

때문이지요.

설령 표현되는 바가 같다 해도

체험한 그것은 그저 배우기만 한 그것과는 아주 다르곤 합니다.


그런데 재미나게도 "나는 누구인가?"라고 물을 때

우리는 침묵하기 보다는 밑도 끝도 없이 답변을 늘어놓기 일쑤입니다.

나 역시 그러한 답들을 쏟아내다가 깊은 공허함을 맛보았습니다.

그 말들 어디에도 나는 들어 있지 않았으니까요.


앞선 두 토막 글에서 지브란은

우리의 의식을 전복합니다.

우리가 우주 속의 작은 하나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다른 한편 그것을 전적으로 뒤집습니다.

우리는 우주 안의 한 조각이기 보다는

그 우주가 우리 안에 숨쉬고 있다고.


한살림 운동을 일으킨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 호가 ‘조 한 알’입니다.

좁쌀 한 알 속에 온 우주가 들었다는 선생의 가르침이 담긴 이름입니다.

한글 모음은 천지인삼재(天地人三才)를 그려담았는데

가없이 큰 하늘, 모든 것을 다 담은 하늘을 점 하나로 표상했습니다.

이것을 ‘아래 아’라고 부르지만, 삼재 가운데 천을 나타내니 ‘하늘 아'라고 부르는 게 마땅하겠습니다.

어쩐지 큰 것은 가장 작게 표현하는 것이 알맞은가 봅니다.

그러면 가장 큰 언어는 가장 작은 언어이고, 그것은 침묵입니다.


가장 많이 말하기 위해 침묵을 택하고,

침묵을 설명하느라 긴 말을 늘어 놓았습니다.

무엇을 물었는가, 그래서 뭐라고 답해야 하는가 다가서지 말고

왜 물었는가를 생각하고 답해 볼까요?

묻는 이의 마음에 들어가기 위해 오히려 제가 당신에게 묻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지브란의 시적 자아에게 질문한 이의 마음을 얻지는 못하였더라도

당신과 같이 읽으며, 내가 전할 답은 찾았습니다.

실로 당신이 누구인지 묻는 것은

당신의 답을 요구하기보다는

당신의 깊은 침묵 속에서

나 역시 당신의 호흡을, 삶을 잠시나마 동반하려는 것입니다.


당신의 은혜로운 침묵 속에서,

그 동반 속에서, 나는 또다시 작으나마 깊게

우주를 체험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