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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월 Oct 25. 2023

즉흥 글쓰기 | 우리 모두는 알아야 한다

[제시문 이어 쓰기] 우리 모두는 알아야 한다

즉흥 글쓰기 | 제시문 이어 쓰기


제시문

우리 모두는 알아야 한다.



우리 모두는 알아야 한다. 그보다 더 청색을 합당하게 묘사한 사람은 없다. 이제부터 그와 천사들이 대결할 것이다. 그는 이미 한 자루 붓을 휘두르며 구름을 타고 이런 일은 전에 없던 것이다. 서른 세 명의 도사들이 짝지어 줄을 섰고 한 명의 도사가 붓을 든 그의 팔을 받쳤다. 그러나 마땅하게도 구름은 그를 싣지 않고 여기 우리와 함께 남겨 두었다. 오늘은 팔랑가대왕 통치 436년 여름의 첫날 5월 29일이다. 팔랑가 천문대는 올해 여름이 이날 시작한다고 공포하였다. 그러므로 낮동안 더없이 맑고 한밤중 큰 비가 내릴 것이다. 내일이면 호수는 넘치고 강이 되어 흐를 것이다. 아이들은 모래놀이를 하던 곳에서 헤엄치고 물놀이를 할 것이며, 물장구가 서툰 아이들도 고기를 잡으며 놀 것이다. 그 하늘, 그 햇살, 그 물결 속에서 그가 청색을 합당하게 그려냈음을 깨달을 것이다.

팔랑가 천문대는 대왕이 건국하기 전부터 하늘을 보고 읽어 주었다. 천문대는 얼추 세어도 스무 개 넘는 왕조가 일어서고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매년 동짓날이 지나고 설이 오기 전 천문대는 온땅을 두루 다니며 이마에 푸른 점이 있는 아이들을 찾아 모았다. 그중 몇몇은 천문관이 되었고 나머지는 천문대의 갖은 일을 나누어 맡았다. 제사는 없었지만 그들은 제관이나 다름없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제가 벌고 거둔 것에서 천문대를 위한 몫을 기꺼이 떼어 바쳤다. 천문대가 서기 전 가뭄과 홍수로 겪던 상실과 공포가 이제 가셨기 때문이다.

천문대의 최고 자리는 경청자였다. 애초 설립자는 보는 자, 관세음이었으나 이어받은 제자는 자신을 낮추어 ‘듣는자’라고 불렀다. 그 뒤 몇 번째인지 모르게 그 자리는 이어졌다. 경청자는 해마다 동지의 정점에 광장으로 난 천문대 창가에 서서 여름이 시작되는 날과 그밖의 날들을 알렸다. 그런 그에게 의혹과 이유 모를 두근거림이 찾아왔다. 청색의 묘사자가 하필 여름을 시작하는 날 구름을 탔다. 화가가 아니지만 화가들이 그를 찬사했다. 무엇보다 그는 구름을 탔다. 관세음 이후 경청자들조차 고작 두서넛 정도만 하늘에 올랐다. 구름은 그 이상을 허락한 적이 없다. 그리고 오늘 아침 그가 붓을 든 채 구름에 올라 하늘에 들었다. 이게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모를 일이다.

경청자 말고는 모두가 태평하였다. 아무도 변고의 징조를 읽지 않았고 영광스런 날들이, 평화롭고 풍요한 날들이 이어질 거라 믿었다. 어린 천문관 중 천사와 묘사자 — 이제 그를 그렇게들 부른다 — 중 누가 이길지를 두고 내기하는 축도 있었다. 이 모든 게 꿈이란 말인가. 경청자는 벽의 절반이 넘는 커다란 창호문을 열었다. 날벌레 몇 마리가 날아들었지만 공기는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막 해가 저물어 조금씩 선선해지는 참이었다. 그러지 말라고 일렀건만 몇몇 일꾼들이 경청자의 뜰에 남아서 덜 마친 일을 굳이 하고 있었다. 이 풍경을 오래오래 보고 싶다. 경청자는 이때 다시금 가슴에 통증을 느꼈다. 두근거림이 다시 시작됐다.

쿵쿵쿵쿵. 누가 알까, 그가 제 심장소리를 듣는 것을. 이리 크게 듣는 줄을. 남이야 상상하든 말든 이 북소리는 때때로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전대(前代)가 대임(大任)을 맡길 때에도 힘껏 뿌리치며 사정을 말했다. 그러나 전대 경청자는 크게 끄덕이고는 한 마디 할 뿐이었다. 그럴 때가 되었지. 대임을 맡고 이미 수년째 모두 해 본 일이지만 새삼 익히고 가다듬어 정신을 돌릴 때, 묘사자의 소문이 들려왔다. 그는 화가는 아니지만 팔랑가의 청(靑)을 누구보다 근사하게 소환한다 하였다. 아니, 보는 이를 청 앞에 데려다 준다 하였다. 어느새 사람들은 경청자와 묘사자가 만나기를 바랐고 국왕도 이는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며 두 사람을 불렀다.

경청자는 어리고 여리여리한 청년을 보았다. 그는 산뜻하고 기운이 넘쳤지만 지혜는 엿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두고 보면 알 일이다. 청년은 앉아서 눈을 감았고 경청자도 눈을 감았다. 왕이 시킨 차를 시종이 차탁 위에 내리기도 전에 콰르르 파도가 쳤다. 그때부터 엄습한 청은 경청자가 눈을 뜰 때까지 휘몰아쳤다. 대전(大殿)에 모인 모두가 청을 접한 게 틀림없다. 주위를 둘러보고 경청자는 숨을 내쉬었다. 청년은 다 안다는 표정으로 경청자를 보고는 빙그레 웃어 마치 ‘먼저 말해 보시지요’하고 양보하는 시늉을 했다. 경청자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일어나 먼저 왕에게 절하고 청년에게도 얕게 절하였다.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가 대전을 나서는 순간 묶은 실이 끊어지듯 후두둑 사람들의 입이 터지고 갖은 탄사와 탄식이 터져 나왔다. 이제 어쩔 것인가.

경청자가 묘사자를 승인했단 소문에 저잣거리는 물론 제자들의 눈이 전부 그의 입을 향했지만,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가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묘사자는 구름을 타러 나섰다. 붓을 들다니. 타고난 광대가 아닌가. 청의 묘사자가 하늘을 오른 뒤 경청자는 소리의 숲 안식의 바위에 손을 얹었지만 천문대 어디에도 이를 대비한 기억은 새겨 있지 않았다. 그러나 경청자의 벼린 감각은 무슨 변고가 일어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게 뭔지 알아챈 건 지금이다.

쿠릉. 예견대로 비가 온다. 다만 이것은. 비맞이 나온 인파 가운데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졌다. 피다. 아니, 피가 아니라 흑우(黑雨), 검은비다. 검은비는 재앙을 알린다. 그 영향에서 벗어나려면 이삼년은 약과다. 지금 이 검은비는 한 천사의 소멸이 아니라 열 위(位), 스무 위, 아니, 더 많은 천사의 소멸을 뜻한다. 경청자는 헤아리기를 그쳤다. 천문대의 대제자들에게 문을 걸어잠그라 이르고 피뢰침을 높이 올리게 명한 뒤 자신은 궁궐로 향했다.

소리의 숲 뒤로는 왕과 경청자만 드나드는 숲의 길이 있다. 예상대로 왕은 대전에서 곧장 밀실로 마중 나와 있었다. 비록 땅에 속한 사람이지만 그는 기이하게 긴 수명과 굳센 심지로 대대로 전대의 신임을 받았다. 대왕, 지금은 땅의 힘을 빌려야겠습니다. 무엇을 말이요. 쇠를 쓰시지요. 왕은 침묵한다. 그러나 그도 이미 알았을 것이다. 확인을 마친 왕은 대전으로 나가 신료들을 부르고 공평무사한, 한편으로 왕에 대한 충성 말고는 어떤 가치나 마음조차 없는 듯한 재상에게 전권을 주어 내보냈다. 쇠에 피가 묻을 것이다.

이제 왕국은, 아니, 세상이 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벽돌 하나, 자갈 하나가 다를 것이다. 참하라. 멀리 명을 전하는 북소리와 나아가는 철갑소리가 철겅거린다. 묘사자가 하늘에서 무엇을 한 것인가. 흑우는 줄긴커녕 더 세차게 빗발치고 있다.



(2023.10.22.)



제한 사항 | 5분, 멈추지 않고.

예외 사항 | 5분이 되고, 5분이 지나도 멈추지 않고 쓴다면 멈칫할 때까지 계속 쓸 수 있음.

실행 사항 | 5분 종료 후 15분 23초 연장하고 마침. 총 20분 23초 동안 만년필로 공책에 쓰고, 완성된 것을 수정 없이 전산 입력함.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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